COVER STORY
부부 피아니스트 랑랑& 지나 앨리스
랑랑을 지나, 사랑으로
2019년, 슈퍼스타 랑랑의 결혼 소식은 클래식 음악계의 이슈였다. 한국계 독일인 피아니스트 지나 앨리스와 결혼하며, 랑랑의 삶은 88개의 건반과 더 촘촘히 이어졌다. 랑랑의 오늘을 만나기 위해, 지나 앨리스를 함께 만나 부부의 삶, 그리고 각자 음악가로 사는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 음악과 사랑, 가정의 끈끈한 연대, 이로 인한 성장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강태욱
01 INTERVIEW
# prologUE
촬영을 앞둔 스튜디오, 예정됐던 아티스트의 도착 시간은 이미 꽤 지났다. ‘역시, 슈퍼스타와의 인터뷰란 이런 것인가’ 실감하며 곧 만날 피아니스트와의 대면을 기다린다. 기다리며 떠올려보면, 그는 시대의 상징을 품은 연주자였다. 1982년에 태어난 그는 부상하던 차이나 파워의 아이콘이었고, 열악한 환경에서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 신화를 쓴 중국의 모차르트이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이 가진 엄숙함을 걷어낸 채 자유롭게 표정과 동작을 자아내는 모습은, 내심 통쾌하기까지 했다.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하는 학생에게 온갖 의성어를 동원해 마스터클래스를 해주던 영상도 참으로 유명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이 꽤 많다는 것을 깨달을 때쯤, “Hello!” 유쾌한 인사와 함께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그가 등장했다. 내가 알고 네가 아는, 바로 그 랑랑이다. 그런데 그 뒤로, “안녕하세요”라며 수줍은 인사가 들려온다. 한국계 독일인 피아니스트 지나 앨리스. 2019년 랑랑과 결혼하며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인플루언서로 떠오른 그녀다.
2025년 객석의 신년 호 표지는, 이 스타 부부 피아니스트 랑랑과 지나 앨리스(1994~)가 장식하게 됐다. 이제는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하는 남편 랑랑, 그리고 곧 만 3세가 될 아들 윈스턴을 둔 아들 바보 랑랑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에 한겹 더 덧입혀질 시간이다.
# 부부 피아니스트가 함께 낸 음반
2024년 2월, 랑랑은 프랑스 작곡가의 레퍼토리로 가득한 음반(DG)을 발매했다. 인터뷰에서 스스로 언급한 대로 랑랑에겐 “여전히 낭만 음악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레퍼토리 확장에 대한 갈망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에게도 실감 나고 있다. 안드리스 넬손스 지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음반에는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라벨·포레의 작품, 그리고 루이즈 파렝(1804~1875), 릴리 불랑제(1893~1918) 등 유명 레퍼토리부터 조명을 기다리는 곡들이 한데 담겼다.
그리고 이 음반에, 사랑스러운 부부의 듀오 연주도 수록되어 있다. 부부가 연주한 작품은 드뷔시의 작은 모음곡 L.65, 그리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R.125. ‘동물의 사육제’는 두 피아니스트,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버전으로 녹음됐다. 1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악장마다 ‘거북이’ ‘코끼리’ ‘수족관’ ‘화석’ 등의 제목이 붙어 있어 클래식 음악 초심자들도 감상이 용이하다.
랑랑 » “가끔 이 작품을 진지하게 대해주지 않는 오케스트라들도 있어요. 물론 ‘동물의 사육제’에는 생상스의 많은 유머가 담겨 있기도 하죠.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동물들도 있고요. 그러나 제 생각엔 생상스가 이 묘사 속에서 인간이 가진 특징이나 성격을 표현한 것 같아요. 그러니 꽤 깊이 있는 의미가 담긴 곡인 거죠. 그런 점에서 안드리스 넬손스/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의 작업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지나 » “사실 생상스는 자신의 생전에 이 곡이 연주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해요. 작곡가로서의 진지한 이미지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 거죠. 실제로 그가 세상을 떠나고 1년 후, 1892년에 정식 초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곡은 분명 모든 세대가 다 즐길 수 있을 만큼 다채로운 작품임이 분명해요. 무척이나 아름다운 선율들도 담겨있고요.”
# 사랑을 전제한 케미스트리란?
형제나 자매 혹은 부녀·부자 지간이 함께 활동하는 음악가 가족은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피아노 듀오의 경우 네덜란드 출신의 루카스·아르투르 유센 형제나 프랑스의 카티아·마리엘 라베크 자매가 그 음악성을 증명한다. 랑랑은 가장 좋아하는 가족 피아노 듀오로 라베크 자매를 꼽으며, “한 사람 같으면서도 또 두 사람 사이의 영감이 느껴진다. 피아노 듀오 연주에 필요한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핏줄 간에 공유되는 것이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이라면, 부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났지만, 이들을 연결하는 음악적 교감은 훨씬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반으로 엮어진 음악적 화학 작용은 듣는 이들에게 특별한 감상을 남긴다.
지나 » “랑랑은 가끔 함께하는 듀오 무대에 올라가기 전, 저를 엄청나게 긴장시켜요. 이 곡을 마지막으로 같이 연주했던 사람이 아르헤리치나 바렌보임,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였다면서요! “그들 다음이 너야”라고 말하곤 도망간다니까요.”
랑랑 » “하하. 아직은 각자의 활동이 많지만, 누가 알겠어요? 미래에 우리 부부가 함께 더 많은 피아노 듀오 연주를 하게 될지. 모차르트·라흐마니노프·풀랑크·슈만 등 피아노 듀오를 위해 멋진 작품을 남긴 작곡가들이 많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은 함께 많은 리허설 시간을 보내는 게 관건인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부부라는 것은 장점이죠. 바렌보임이나 에셴바흐와 함께 연주한 때를 떠올려보면, 리허설을 정말 많이 한 기억이 있어요. 듀오는 독주와는 또 다른 연습의 방식이 필요하죠.”
지나 » “이번 음반에 수록된 곡 중에서는 특히 드뷔시의 작은 모음곡(L.65)을 준비하면서 음악적 호흡을 강도 높게 맞춰갔어요. 프랑스 레퍼토리를 연주하기 위한 타건 방식까지 공유하면서요. 음 하나하나가 가진 색깔을 표현하는 데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랑랑에게 녹음에 대한 노하우도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의 연주와 달리, 녹음을 할 때는 마이크가 악기와 가까워서 훨씬 더 정교하고 미세한 표현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운명
랑랑의 결혼 소식이 유독 한국에서 화제가 됐던 이유는 지나 앨리스가 ‘한국계’라는 점도 컸다. 한국 관객의 입장에선 이 결혼으로 랑랑이 왠지 더 친숙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 랑랑과 지나 앨리스의 만남은 어떤 계기였을까.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궁금한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며, 독자들을 핑계 삼아 질문의 운을 띄웠다.
두 사람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요. 예를 들면,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 같은…?
(한국말 질문을 먼저 이해한 지나가 듣자마자 크게 웃었다. 눈이 동그래진 랑랑에게 지나가 직접 질문을 영어로 번역해 줬다.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됐지만, 그 외의 부부간 소통은 중국어로 했다)
랑랑 » “(질문의 내용을 이해하자마자) 그건 당연히 저죠! 저희의 러브스토리에 흥미로운 얘기가 많답니다. 처음엔, 독일 국영 TV의 프로듀서인 지나의 아버지를 먼저 알았어요. 지나가 그 프로듀서의 딸이란 사실을 모른 채, 저는 지나가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 데뷔 무대를 하는 것을 봤었고요.”
2년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랑랑의 연주회 리셉션에서 둘은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서로에게 놀라움이었다. 랑랑은 독일인인 프로듀서에게 아시아계 딸이 있다는 사실에(지나는 독일인 아버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나는 ‘무려’ 힘든 독주회를 끝낸 랑랑이 자신에게 디저트를 가져다줬다는 사실에.
지나 » “그 후로도 또 아무 일 없이 2년이 지났어요. 그사이 저는 프랑크푸르트 음대에서 제 음악 공부 과정을 다 마쳤고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랑랑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죠. “안녕, 난 랑랑이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데, 내 콘서트에 오지 않을래?”라고요.”
랑랑 » “우리 시작은 그때부터였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저희 사이에 신기한 운명이 한 가지 더 있어요. 결혼 후 지나의 어머니께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나가 태어난 날, 정말 날씨가 좋았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네, 맞아요. 그날 프랑크푸르트 날씨가 참 맑았죠”라고 답했죠. 장모님은 깜짝 놀라시면서 “1994년 8월 22일 프랑크푸르트 날씨를 어떻게 아냐”고 하셨지만, 그때가 제가 처음으로 중국을 떠나 애틀링겐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 출전했을 때였거든요. 콩쿠르에서 우승까지 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중국으로 돌아가던 그 맑았던 날이 기억에 생생했죠. 그러니까 지나가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던 바로 그날, 저도 프랑크푸르트에 있었던 거예요! “말도 안 된다”는 장모님의 반응에 그날 프랑크푸르트 교회 앞에서 찍은 사진도 보여드렸어요. 참 운명적인 부부죠?”
# 사랑 이후, 랑랑의 레퍼토리에 대해
두 사람의 운명적인 러브스토리에 흠뻑 빠져 듣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랑랑을 만난다면 물어야 했던, 최근의 행보와 음반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2017년 랑랑은 손목 건염으로 1년간 연주 활동을 쉬었다. 쉬는 기간 아내의 적극적인 지지가 그에게는 큰 힘이 됐다고. 그렇게 사랑을 쟁취한 후, 2020년에 그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DG)을 선보였다. 피아니스트에게는 도전의 정점에 있는 레퍼토리였다. 이어서 그는 ‘엘리제를 위하여’와 같이 피아노를 즐기는 초심자들을 위한 작품을 담은 ‘피아노 북’, 월트 디즈니사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동심의 음악을 담은 ‘디즈니 북’을 발매했다. 단지 건염으로 인한 신체적 변화 외에도, 음악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 혹은 스타일이 변하고 있는 것일까?
랑랑 »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한 것은, 제 음악적 스타일의 변화와는 상관이 없어요. 아주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었으니까요. 단지 바로크 음악을 연주해보고 싶었을 뿐이죠. ‘피아노 북’이나 ‘디즈니 북’ 같은 프로젝트는 그간 늘 해왔던 것처럼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어요. 기존의 제가 해왔던 활동들이죠. 달라진 점은 없어요.”
그러나 그에게도 분명 변화는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음악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그의 대답. 클래식 음악계의 영원한 이슈메이커였던 랑랑에게도, 40대를 넘으며 성숙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다.
랑랑 » “스타일을 바꾼다기보다는, 음악에 대한 깊이와 성숙이 필요한 것이겠죠. 단순히 빠르게 연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잘 아시겠지만, 사실 저는 그간 낭만 협주곡을 많이 연주해 왔습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같은 곡들이요. 물론 정말 위대한 작품들이지만 지나치게 많이 연주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늘 새로운 작품들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거든요. 버르토크의 협주곡 3번, 라벨 혹은 마누엘 데 파야 같은 스페인 작풍의 곡들이 있죠.”
적어도 랑랑의 바람이 앞으로 이뤄진다면, 이전보다 더 다양한 레퍼토리에 도전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기사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 이 시간에도, 랑랑이 샹송 가수 자크 브렐의 노래 ‘Quand on n’a que l’amour’(사랑 밖에 없을 때)의 편곡 버전을 테너 벤저민 베른하임과 녹음한 음원이 공개되고 있다.
랑랑 » “어떤 종류의 음악이든, 그 곡을 새롭게 연주하고 이해하는 것은 연주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올해 생상스 음반을 발매하고 연주한 것은 제 쇼팽 연주에 영향을 주죠.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구하면, 그 음악을 접한 경험은 베토벤, 슈만, 브람스를 연주하는 데에 연결됩니다. 물론 낭만 시대 음악은 제 핏속에 흐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편안한 영역이지만, 저는 늘 그 이상의 연주를 하길 바라요.”
MINI INTERVIEW
랑랑의 아내가 아닌, 지나 앨리스에 대하여
사실 피아니스트 랑랑은 우리에게 친숙한 연주자다. 그가 어떤 스타일의 연주를 구사하는 피아니스트인지부터, 그 스타일을 구사하기까지의 성장 배경, 대표 레퍼토리 등이 무엇이었는지도 익숙하다. 그에 비해 지나 앨리스는 ‘랑랑의 아내’라는 것 외에, 피아니스트로서의 정보는 아직 부족한 상태. 그녀는 랑랑과의 결혼 후 2021년, 데뷔 음반 ‘원더월드’(DG)도 발매했다. 이제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싱어송라이터인 지나 앨리스에 대해 알아봐야 할 시간이다.
처음 피아노를 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클래식 음악은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 집에 흐르고 있는 음악이었어요. 심지어는 제 부모님 두 분의 인연도, 피아노를 통해서 시작되었으니까요. 가끔 농담으로 제 존재 자체가 피아노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 한국 쪽 가족, 그러니까 제 외할머니도 피아노와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무척 많으셨어요. 할머니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랑랑의 연주를 들었던 기억도 가지고 계세요. 이런 환경에서 저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연주자가 되길 결심한 것은 언제였나요?
무대를 통해서 삶의 희로애락을 많이 경험했던 것 같아요. 물론 부모님의 전적인 지원도 있었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감정들은, 피아노를 배우며 느꼈습니다. 무대 위에서 나 자신을 믿는 법도 배웠죠. 그러다 15살쯤에 자신에게 물었던 것 같아요. 이 음악을 정말 평생 하고 싶은지 말이죠.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 음대를 졸업했으니 독일식 피아니즘에 익숙할 것 같아요.
제 연주에 영감을 준 멘토들에 대해 얘기하자면, 러시아 출신의 스승도 많은 편입니다. 처음 피아노를 배운 것은 이리아 에델슈타인으로 러시아 출신의 마치 엄마 같은 선생님이었죠. 자연스럽게 음악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이후 역시 러시아 출신의 레브 나토체니에게서 배웠는데, 러시아식 테크닉을 제대로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올바른 연주법을 연습할 수 있었어요. 이후 독일인 베른하드 웻츠에게서는 브람스 같은 독일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음악적 깊이를 이해할 수 있는 철학들까지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게리 그래프먼도 저에게 영향을 끼친 분입니다. 오케스트레이션과 거대한 선율 등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제 삶의 멘토는 지금 제 옆에 앉아 있네요. 바로 랑랑이죠.
랑랑으로부터 받은 음악적 영감은 무엇인가요?
무대 위에서의 효과적인 연주법인 것 같아요. 연주를 위해 필요한 마법 같은 기술들은 랑랑에게서 배웠습니다. 똑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려하게 됐죠.
2021년 데뷔 음반 ‘월더월드’(DG)에는 한국 동요 ‘엄마야 누나야’ ‘반달’ 등을 편곡해 삽입했어요. 그만큼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에 대한 각별함이 있어 보이는데, 본인에게 한국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사실 한 번도 한국에서 살았던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 매년 엄마와 함께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추억도 많고, 한국 문화를 많이 즐겼죠. 가끔은 완전히 독일인도, 완전히 한국인도 아닌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여러 나라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넘어 싱어송라이터로서 팝 음반을 발매하는 등 다양한 음악 장르의 작업을 하고 있고, 브랜드 광고 모델, TV쇼 출연까지 하는 다재다능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 활동 분야를 오가며 지키는 본인만의 기준이 있나요?
제가 하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가 저라는 사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제 마음은 마치 DNA처럼 제 안에 자리 잡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저를 표현할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죠. 하지만 제가 다양한 활동을 한다고 해서, 서로 다른 장르를 섞지는 않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연주할 때는 오로지 클래식 연주자로서, 팝 음악에 도전할 때는 팝 음악만을 하려고 해요. 음악적 분야를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 가정을 통해 배운, 사람을 향한 온도
당신은 나의 영혼, 나의 심장 당신은 나의 기쁨이자, 오 나의 고통 (…) 당신의 시선은 나를 맑게 하며 당신은 나를 사랑스럽게 높여 준다네 나의 선한 영혼, 나보다 나은 나의 반쪽 -R. 슈만 ‘미르테의 꽃’ 중 ‘헌정’
R. 슈만이 드디어 클라라 슈만과 결혼하게 된 해, 이 결혼의 기쁨은 그의 폭발적인 창작열로 이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한 1840년은, 슈만 ‘가곡의 해’라고도 불리는 때로 이 해에 그가 작곡한 가곡은 140개에 육박한다. 그렇게 결혼과 가정은 음악가의 삶뿐 아니라 예술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R. 슈만의 ‘미르테의 꽃’ 중 ‘헌정’은 1840년에 지은 작품으로, 결혼식 전날 클라라 슈만에게 헌정되었다.
랑랑의 삶에도 지나 앨리스와의 결혼으로 찾아온 아들 윈스턴이 새로운 감정과 일상의 기쁨을 안겨주고 있다. 부부는 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말이 많고, 표정도 밝다.
지나 » “아이가 두 살이 되었을 때, “나 첼로 하고 싶어!”라고 하더라고요. 첼로도 사주고, 배울 수 있는 선생님도 붙여줬는데 연습은 하나도 안 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엄마, 이 소린 공룡이야!”라는 말만 하는 거 있죠. 제가 보기엔 진짜 첼로를 하고 싶은 건 아닌 게 분명해요.(웃음)”
랑랑 » “윈스턴은 엄청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것 같아요. 지나는 엄마로서 엄격한 역할이고 덕분에 저는 조금 너그러운 역할이랄까요. 아이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배우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니까, 저도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게다가 아이와의 교감을 통해서,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적 관점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하게 됐어요. 이 이해는 제가 운영하는 랑랑 국제음악재단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2008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랑랑 국제음악재단(Lang Lang Inter-national Music Foundation)은 미국과 중국에서 6~10세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을 펼치고 있다. ‘101명의 피아니스트’ 프로젝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는 중. 중국의 수많은 ‘랑랑 키즈’를 양산해 낸 영향력을 갖춘 만큼, 그는 마스터클래스 등을 통해 다음 세대의 피아니스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랑랑 » “많은 중국 학생들이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재단을 운영하면서는 더 많은 피아니스트에게 최고의 음악적 경험을 제공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피아노 교육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교육의 결실입니다.”
덧붙여 그는 “누군가의 연주를 한 번만 듣고 그 실력을 평가할 순 없다”고 전했다. 다음 세대에 대한 이 교육관은 앞서 랑랑이 말했던 것처럼, 아이를 통해 얻게 된 부드러운 관점일까? 혹은 일찍이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자신의 해석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많이 들어온 경험 때문일지도 모른다.
랑랑 » “우리의 역할은 피아니스트가 가진 더 나은 면을 더 끌어내고, 약점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클래식 음악에서 피아니스트는 ‘해석자’들이니까요. 마스터클래스를 할 때 가장 좋은 방향은, 학생들에게 이상을 보여주고 이를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몇 가지 팁을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순간 ‘와,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라고 느낀다면, 그리고 ‘앞으로 이런 방향의 연주를 더 도전해 봐야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게 제가 가르쳐줄 수 있는 최선이죠.”
# 음악과 가정 사이의 줄다리기
가정과 음악 모두에 헌신적인 삶. 그것이 지금 이 부부가 꿈꾸고 추구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남편과 아내 모두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랑랑에게 지나 앨리스는 어떤 아내이며, 지나 앨리스에게 랑랑은 어떤 남편인가요?
랑랑 » “아내는 가족에게도 헌신적인 만큼, 음악에도 헌신적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커리어를 잘 이어가고 있어서 기뻐요. 저는 아내가 단순히 집에만 머물러 있길 바라지 않아요. 때문에 매일 함께 있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있답니다.”
지나 » “남편의 연주가 낭만적인 것처럼, 그 마음 깊숙한 곳에 로맨틱한 면이 있답니다. 다른 부부들처럼 늘 모든 것을 같이 하진 않지만, 최선을 다해서 서로를 위해주죠. 랑랑은 우리 가족에게 가장 큰 존재입니다. 제가 꼭 말하고 싶은 것은, 그가 음악계의 슈퍼스타지만, 동시에 저를 응원해 준다는 점이에요. 저 또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힘이 돼요.”
올해 랑랑은 미국 카네기홀 ‘퍼스펙티브 시리즈’의 아티스트다. 이는 카네기홀 상주 음악가와 같은 개념으로, 랑랑은 앞으로 2년간 카네기홀에서 새로운 레퍼토리에 도전한다. 여기에는 소프라노 엔젤 블루와 듀오로 선보일 가스펠 음악 등도 포함되어 있다.
랑랑 » “새로운 작품들을 연구하고 선보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깁니다. 올해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과 함께 하는 투어도 준비 중입니다.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함께 슈베르트부터 벨리니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공연도 준비 중이네요. 기존에 해왔던 독주회나 오케스트라 협연 공연에 더해 다양한 실내악 공연도 많이 선보이는… 네, 2025년도 정말 바쁜 한 해가 되겠네요.”
지나 » “저 또한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처럼 가정과 일의 균형을 잘 맞추려고 해요. 클래식 음악 무대에 서기도 하고, 제 자작곡이 담긴 팝 음악 작업도 더 많이 진행할 계획이에요. 지금처럼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일도 계속하겠죠. 바쁜 삶에서 무엇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요. 부모의 역할도 중요하니까요. 윈스턴이 올바른 방향으로 자라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제게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 Epilogue
늦어진 시작이 무색하게, 랑랑과 지나 앨리스는 긴 시간을 본지와의 인터뷰에 할애해 주었다. 무엇보다 부부 간의 사소한 이야기든, 진지한 음악적 이야기든 그들은 어떤 질문에도 곤란한 기색 없이 진심으로 답변했다. 오늘 만난 이들이 ‘슈퍼스타’보단, 음악에 진심인 사랑스러운 부부 피아니스트에 가까웠음을, 긴 인터뷰가 끝날 때쯤 깨달을 수 있었다.
만족할 만큼의 답변을 모두 듣고 난 후, 두 사람에게 독자들에게 보낼 신년 인사를 담은 사인을 요청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한국말로 적어주실 수 있냐”는 기자의 요청에 지나 앨리스가 흔쾌히 “그럼요!”라며 먼저 펜을 들었다. ‘To. 객석’으로 시작하는 아내의 사인을 본 랑랑이 “이 한글이 잡지의 이름이냐”고 묻더니 아내의 사인에 적힌 ‘객석’을 따라 그리고 뿌듯하게 웃었다. 이 글자는 지나 앨리스가 본, “처음으로 랑랑이 쓴 한글”이었다.
글 허서현 기자
ABOUT
중국의 피아니스트들
랑랑 이전, 그리고 랑랑 이후
중국에 현대 피아노 음악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세기 초. 선교사들에 의해서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서 공연된 최초의 피아노 독주회는 1914년 이탈리아인 마리오 파치(Mario Paci, 1878~1946)의 연주회였다. 그는 중국에 오래 머물며 상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이후 상하이 음악원으로 불리는 국립 전문음악학교 설립에도 기여했다. 중국 내에서 1세대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탕 리링, 저우 광렌 등이 그의 밑에서 성장했다.
1950년대는 러시아(구소련)의 음악 교육 체계를 도입하기 시작해 주요 도시에 다수의 음악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또한 중국 국비로 피아니스트들의 유학이 적극 추진된다. 이에 피아니스트 푸총(1934~2020), 인청쭝(1941~), 리우시쿤(1939~)과 같은 이들이 국제 콩쿠르에서의 수상으로 두각을 드러낸다. 푸총은 쇼팽 콩쿠르에서 3위(1955)를, 인청쭝은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위(1962)를, 리우시쿤은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위(1958)를 차지한다.
날개를 달던 중국의 피아노 음악계는 1966년, 마오쩌둥에 의한 문화대혁명으로 꺾였다. 사회주의 사상과 맞지 않는 음악은 더 이상 연주될 수 없었고, 클래식 음악은 부르주아 음악으로 간주하며 금지됐다. 앞서 언급된 푸총과 리우시쿤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수감되었고, 인천쭝은 중국 작곡가 셴싱하이의 합창곡 ‘황하’를 동명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해 선보이며 연주의 명맥을 이었다. 이 시기를 경험한 비운의 피아니스트로 주샤오메이(1949~)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신동으로 주목받았지만, 문화대혁명에 의해 수용소 생활을 했다. 뒤늦게 그 재능을 펼친 그녀는 미국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공부를 마쳤고, 40대에 파리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 그녀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는 청중의 심금을 울렸다.
10년의 문화대혁명 시기가 끝나고 맞이한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은 다시 음악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90년대에는 피아노 교육의 진정한 대중화가 이뤄지며, 중국이 전 세계 피아노 시장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다. ‘바링허우(80년대생)’로 불리는 이 시기 탄생한 피아니스트들은 클래식 음악 교육의 혜택을 완벽히 흡수했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유자 왕(1987~), 랑랑(1982~), 사첸(1979~)과 같은 피아니스트들이 활동 중이다.
꾸준한 확장세를 보여온 중국의 피아노 시장에 대해 최근 그 열풍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보인다. 중국 피아노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펄리버(Pearl River) 피아노와 하일룬(海伦) 피아노는 2024년에 전년 대비 20% 이상 매출이 감소했다. 우리나라 또한 비슷한 현상을 미리 겪었음을 떠올려볼 때, 중국의 피아노 시장 또한 내실을 다지는 기점을 맞이한 듯하다.
1990년생으로는 밴 클라이번 우승 이후 음반을 통해 자신만의 해석을 확고히 하는 장하오천(1990~)이 대표적이다. 현재는 제제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중국계 미국인 장주오(1989~)도 비슷한 연배 내에서 국제 무대를 활발히 누빈다. 2000년대생 피아니스트 중에는 2021년 알파 레이블에서 데뷔음반을 발매한 안티안수(2000~), 미국에서 태어나 BBC 영 뮤지션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로렌 장(2001~)이 기대를 받고 있다.
글 허서현 기자
02 DISCOVERED
랑랑, 그리고 쇼팽
숨겨진 쇼팽의 보물을 발굴하고 세상에 알리다
“‘뉴욕 타임스’ 지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하비에르 C. 에르난데스)에게 전화가 왔어요. 단 한 번도 연주된 적 없는 쇼팽의 악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죠.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죠. 그 뒤로 메일로 악보를 받았는데, 세상에! 악보에서 쇼팽의 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랑랑은 곧바로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덧붙였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 반음계적 선율, 화성, 구조, 그리고 음악을 시적으로 만드는 그만의 우수에 찬 비애. 그는 친구인 하비에르 C. 에르난데스 기자에게 이를 “어디서 찾아냈냐”고 다시 전화를 걸어야 했다.
쇼팽의 신곡 발표, 진짜일까?
에르난데스 기자는 지난해 10월 27일 ‘뉴욕 타임스’에 쇼팽의 새로운 악보 발견을 보도했다. 지난봄, 작곡가이자 큐레이터인 로빈슨 매클렐런은 모건 도서관 & 박물관의 금고에서 ‘쇼팽’이라는 이름이 제목 란에 붙은 아주 작은 악보를 찾아냈다. 악보는 가로 13cm, 세로 10cm로 크지 않았다. 그는 곧장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저명한 쇼팽 학자 제프리 칼버그(1954~)에게 사진을 보냈고, 몇 가지 감정에 들어갔다.
모건 도서관은 악보의 종이와 잉크가 당시의 것인지 확인했고, 쇼팽이 사용했던 것과 유사하다는 결론을 냈다. 전문적인 시선을 모으기 위해, 다수의 쇼팽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는 폴란드의 국립 프리데리크 쇼팽 인스티튜트의 아르투르 슈클레네르(1972~) 원장에게 이 악보에 관한 몇 가지 물음을 남겼다. 슈클레네르 원장은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뉴욕 모건 도서관에서 발견된 자필 악보는 쇼팽이 파리에 머물던 초기에 사용했던 갈색 잉크와 유사하며, 종이 역시 당시 파리에서 사용되던 것입니다. 또한, 작곡가가 1830~1835년 사이에 보여주었던 음악 양식과 가장 일치합니다.”(슈클레네르 원장)
다만 그 누구도 ‘이 작품은 쇼팽의 것이라 단언’하지 않으며, 이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라 전했다. 또한 쇼팽의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시각도 충분히 존재한다. 우선 미완성 작품이라 주제 선율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는데, 다이내믹 또는 손가락 번호와 같은 지시 사항이 이미 적혀있다는 점도 그러하다. 모건 도서관 역시 제목 자리에 적힌 필기체 이름 ‘Chopin’ 역시 쇼팽의 일반적인 서명과 달라 후에 누군가 적어 놓은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한편, 그럼에도 이 악보 위에 ‘쇼팽이 전혀 없다’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쇼팽 인스티튜트는 쇼팽의 작품이라고 알려졌지만, 연구 결과 로스차일드 남작 부인이 쓴 것으로 밝혀진 c단조 녹턴 Op. posth의 예를 들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순수하게 로스차일드 남작 부인의 것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그의 스승이었던 쇼팽이 작곡을 돕거나 아이디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출판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악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쇼팽의 즉흥연주 세계는 방대했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음악적 아이디어가 상당히 존재했을 것이며, 우리는 이를 여러 단편으로만 마주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발견된 필사본 역시 쇼팽 손끝에서 연주되었던 즉흥연주의 흔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작은 종이에 악보를 그려 선물로 주는 경우가 있었고, 발견된 악보도 그 갈래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쇼팽이 썼을지도 모르는 친필 원고가 발견됐다는 것은 온 세상의 음악학자를 흥분시키는 일이지요.”(슈클레네르 원장)
“녹음을 부탁해요, 랑랑!”
여러 감정 이후, ‘뉴욕 타임스’의 편집부와 여러 쇼팽 학자는 이 작품이 쇼팽의 것일 수 있다는 의견이 충분히 모였다 생각했고, 10월 말에 이를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의 에르난데스 기자는 대중이 이 발견 소식을 들으면 작품 듣고 싶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보도와 멀지 않은 날짜에 이를 발매할 수 있도록, 이 소식을 미리 전해 녹음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를 곧바로 떠올렸는데, 그가 바로 랑랑이었다. 이 뒤로는 랑랑이 전한 대로.
“대단히 영광스럽죠. 작품을 보고서 느낀 점은, 악보가 굉장히 시각적으로 다가왔다는 거예요. 영화의 장면처럼요. a단조잖아요. 영화에 걸맞은 조성이죠. 이밖에는 무슨 묘사를 더하기 참 어렵네요. 아시다시피, 참 짧은 곡이니까요. 반복을 안 하면 20초 내에 완주할 수도 있을 정도로요. 자연 속 집에 있는데, 비가 와서 그 기분에 즉흥연주를 하는 듯한 모습이죠.”(랑랑)
연락을 받은 후인 10월 초, 맨해튼 스타인웨이홀에서 랑랑은 이 작품을 녹음했고, 11월 8일 DG 레이블을 통해 음원을 발매했다. 지난 11월 30일에 열린 내한 공연에서는 이 작품을 앙코르로 연주하면서 “아시아 초연입니다”라는 말도 전했다. 그의 답변처럼 음원은 1분 21초가 전부이며, 이는 악보 전체를 다시 한번 반복하여 연주한 길이이다. 쇼팽의 왈츠는 도돌이표로 반복되는 것이 일반이니, 올바른 선택이다. 데뷔 이후 오늘날까지 그가 쇼팽 작품을 연주한 횟수를 과연 셀 수 있을까? 작품의 검증은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만, 수백, 수천 번 연주한 쇼팽을 이 악보에서 ‘들었다’라고 열의 있게 설명하는 랑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의 연주에선 분명 쇼팽이 들려오는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국립 프리데리크 쇼팽 인스티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