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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
심청을 새롭게 눈뜨게 하다
올해 전주세계소리축제의 개막작 ‘판소리 씨어터 심청’ 제작기
올해 단 하나의 화제작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작으로 무대에 오르는 ‘판소리 씨어터 심청’을 주저 없이 떠올릴 것이다.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위원회가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독일 만하임 오페라극장의 상임연출가 요나 김이 대본과 연출을 맡아 기대를 모은다. 무대 디자이너 헤르베르트 무라우어, 의상 디자이너 팔크 바우어 등 요나 김의 오랜 창작 동료들도 함께하며 공연 애호가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의 어린이 합창단 60명을 포함해 총 130여 명의 출연진, 국립창극단 기악부와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참여하고, 제작비만 10억 원이 투입되는 등 규모 면에서도 한국 음악극 역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정식 개막을 앞두고, 요나 김에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을 수 있었다.
정형을 벗고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넘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오페라 연출가로서, 판소리극을 연출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2022년 바그너의 ‘링’ 내한 공연 당시, 한 기자에게 ‘한국인으로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연출할 계획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 질문이 내게 결정적인 씨앗이 되었다. 그때부터 판소리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작품의 장르를 ‘판소리 씨어터’라고 명명한 이유가 있는가.
‘창극’이라는 말에서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차별을 주고 싶었다. 이번 공연의 본질적인 두 요소인 판소리와 극(씨어터)을 조합해 ‘판소리 씨어터’라는 용어를 택했다. ‘씨어터(theater)’는 전 세계적으로 무대에서 액팅하는 모든 공연 장르를 아우르는 공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기존 판소리 ‘심청가’의 동초제와 강산제의 대사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서사 구조를 어떻게 새롭게 만들었는가?
간단히 말해, 텍스트(어휘나 문장)는 그대로 두되, 그 배치와 상황을 바꾸어 맥락(Context)을 새롭게 구성했다. 이는 구문론(Syntax)의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대본을 고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끊임없이 요구받는 오페라 연출을 통해 훈련된 것이다. 극적 상황의 배치를 새롭게 하다 보면 슬픈 가사가 웃기게 들리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
‘딸’의 이야기에서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로
주인공 심청과 심봉사의 해석이 기존 판소리나 창극과 완전히 다르다고 들었다.
심봉사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딸을 사지로 내모는, 일종의 살해자다. 그가 눈을 떠서 본 세상은 지옥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눈을 뜨고 ‘본다’는 것은 일종의 메타포로, 단순한 시력 회복이 아닌, 자신의 처지와 약점을 자각하고, 수치스러운 내면과 세상의 끔찍함을 인식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본 세상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심청은 타자화된 로망, 즉 우리의 욕망이 투영된 이상적 존재다. 아버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사생활도 감정도 없는 인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욕망이 만들어낸 이데아적 존재이며 동시에 우리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원작의 유교적 가치관을 넘어, ‘심청’이라는 인물에 담긴 오늘날의 보편적 의미는 무엇일까?
전 세계적으로 문학 작품의 주인공은 대부분 약자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약한 존재는 ‘딸’이다. 특히 유교문화권에서 딸은 권리도, 이름도, 인격도 없는 존재로 단지 역할만을 부여받는다.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이도 딸이다. 그리스 비극의 안티고네나 카산드라 등 서양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오페라의 여주인공들도 대부분 그렇다. 나는 예술가로서 언제나 이러한 약자들에게 본능적으로 시선이 간다. 이것은 단순한 젠더 갈등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 전반의 문제다. 외국인 노동자, 사회적 재난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사람들 모두가 오늘날의 심청일 수 있다.
판소리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판소리는 원초적이고 직접적이다. 오페라의 발성이 초월적이고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면, 판소리 발성은 듣는 이의 뼈가 녹는 듯한, 직관적인 감각을 준다. 국립창극단 단원들과의 협업도 신선하고 흥미로운 경험이다. 매일 호기심으로 가득한 만남이 이어지고, 단원들이 진심으로 협조해서 행복하게 작업하고 있다.
‘심청’을 계기로 생긴 새로운 비전이 있다면?
심청뿐 아니라 판소리 다섯 바탕 전체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링’ 시리즈처럼 연작 공연으로 올리고 싶다. 흥보가부터 시작해 하루에 한 작품씩, 중간에 하루는 쉬고, 그렇게 일주일간 다섯 바탕이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하는 날을 꿈꾼다.
글 이소영(음악평론가) 사진 국립극장
요나 김 미학·문학·철학을 전공하고, 빈 국립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2005년 독일 부퍼탈 시립극장에서 오페라 ‘자이데’로 데뷔, ‘투란도트’ ‘니벨룽의 반지’ ‘노르마’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과 2015년 국립오페라단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등의 연출을 맡았다.
PERFORMANCE INFORMATION
제24회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국립창극단 ‘심청’
8월 13·14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9월 3~6일 국립극장 해오름
요나 김(연출·극본), 한승석(작창·음악감독)/ 김우정·김율희(심청), 김미진(노파심청), 김준수·유태평양(심봉사), 민은경·이소연(뺑덕어멈), 김금미(장승상댁 부인), 이시웅(낯선남자) 외
FESTIVAL
전주세계소리축제 집행위원장 김희선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전통을 재해석하기
올해 전주세계소리축제(이하 소리축제)는 ‘본향의 메아리’를 주제로,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닷새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전주한옥마을 일대에서 열린다.
총 57개 프로그램, 69회 공연으로 구성된 이번 축제는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음악과 월드뮤직·클래식 음악·대중음악·어린이 프로그램 등 모든 세대가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인다.
올해 소리축제의 키워드는 ‘본향의 메아리’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개막공연 ‘심청’의 연출가 요나 김에게 영감을 받았다. 해외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한국인 오페라 연출가가 전통 판소리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하며, 가장 동시대적인 ‘심청’을 만들어가는 작업의 의미를 담고 싶었다. 소리축제의 근간인 판소리 또한 본향에 뿌리를 두고 여러 지역으로 파생해 나간 음악이라는 점에서, 중의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주제를 형성했다.
소리축제는 매년 다양하고 특색있는 세계음악을 소개해 왔다. 올해 초청 공연 중 주목할 무대는 무엇인가.
일본의 미야타 마유미는 아시아월드뮤직어워드 수상자로, 이번 소리축제 무대를 통해 아시아 현대 음악이라는 특정 장르 안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과 일본의 전통관악기인 생황(笙)과 쇼(笙) 연주자들이 형성한 아시아 예술 네트워크의 확장을 이끌 수 있는 계기로도 의미가 깊다.
앞으로 소리축제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앞으로도 좋은 공연을 통해 전통예술 장르의 수준 높은 공연예술제를 선보이고, 전국과 전 세계의 관객이 소리축제를 중심으로 모일 수 있기를 바란다.
글 홍예원
PREVIEW
전주세계소리축제 – 본향의 메아리 8.13~17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전주한옥마을 외

마드리드 테아트로 레알 무용단
축제의 대표 브랜드인 ‘판소리 다섯바탕’은 남상일의 ‘수궁가’(8.13), 이난초의 ‘흥보가’(8.14), 윤진철의 ‘적벽가’(8.15), 염경애의 ‘춘향가’(8.16), 김주리의 ‘심청가’(8.17)로 구성되며, 소리판의 내로라하는 명창들이 각기 다른 시대성과 개성을 지닌 목소리로 무대를 채운다. 소리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젊은 흐름을 품은 이 구성은 전통 계승과 세대교체의 균형을 꾀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젊은 소리꾼들의 존재감은 ‘청춘예찬 젊은판소리’(8.13·14)에서 두드러진다. 전국 공모를 통해 선발된 다섯 명의 신예가 각자의 서사를 담은 완창 무대로 관객 앞에 선다.
올해 축제의 주제를 가장 뚜렷하게 담고 있는 기획은 단연 ‘디아스포라 포커스’다. 지순자의 ‘신민요’(8.16), 윤은화의 ‘양금로드’(8.17)는 각각 민중의 기억과 악기의 여정을 담아내며, 전통과 창작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대를 선사할 예정이다. 기악 연주의 정수는 ‘산조의 밤’(8.15)에서 만날 수 있다. 이지영의 ‘이지영류 가야금 산조’, 이용구의 ‘전추산류 단소 산조’는 각각 고유의 유파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내며 산조 특유의 즉흥성과 깊이를 무대 위에서 증명한다. ‘성악열전’(8.15~17)에서는 범패, 여창가곡, 경기민요 등 평소 접하기 어려운 전통 성악 장르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한국 전통음악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다.
해외 초청 공연에는 일본, 스페인, 브라질, 프랑스 등 총 12개국 12개 팀이 축제에 참가해 국경을 넘은 예술적 소통을 펼친다. 특히 일본 전통관악기 쇼(笙)의 거장 미야타 마유미(8.16), 스페인 수교 75주년을 기념하는 마드리드 테아트로 레알 무용단의 플라멩코 공연(8.17)이 기대를 모은다. 자연 속 전통 공간에서 펼쳐지는 ‘전주의 아침’(8.14~17)도 주목할 만하다. 완주 아원고택과 학인당 등 고즈넉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산조와 전통악기 공연은 아침의 고요와 어우러져 관객에게 특별한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할 폐막공연은 안은미컴퍼니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8.17). 1945년생 ‘광복둥이’와 70세 이상 지역 어르신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피날레를 연출한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전주세계소리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