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선우예권, 리스트를 노래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5월 28일 8:00 오전

FOCUS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리스트를 노래하다

새 음반 ‘리스트’로 돌아온 선우예권이 들려주는 비르투오시티 너머의 노래와 드라마

 

©Rohsh

흔히 리스트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압도적인 비르투오시티다. 그러나 선우예권이 이번 ‘리스트’ 음반과 리사이틀에서 주목한 점은 화려함 이면에 놓인 ‘노래’와 ‘드라마’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피아노라는 악기가 인간의 목소리와 그 깊은 서사를 어디까지 품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러한 행보는 지난 몇 년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레퍼토리의 연장선 위에 있다. 2020년 ‘모차르트’(Decca)를 통해 고전적 구조와 절제된 균형미를, 2023년 ‘라흐마니노프, 리플렉션’(Decca)에서는 감정의 파고를 확장하며 그만의 깊이를 증명해 냈다.
그리고 올해, 그는 상반된 두 세계를 하나로 잇는 가교로서 ‘리스트’를 택했다. 슈베르트의 내밀한 독백에서 시작해 리스트의 극적 서사로 나아가는 이번 공연은, 단순한 레퍼토리 확장을 넘어 선우예권의 음악적 관점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5월 15일 익산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대구·성남·창원·울산·양산을 거쳐 3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 이르는 이번 투어를 앞두고, 그와 메일로 대화를 나눴다.

 

모차르트와 라흐마니노프를 거쳐, 리스트를 선택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히 레퍼토리를 넓히는 차원이 아니라, 피아노라는 악기가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 특히 인간의 목소리와 그 안의 극적인 서사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했어요. 모차르트와 라흐마니노프를 통해 각각 ‘구조와 균형’, 그리고 ‘감정의 확장’을 깊이 탐구해왔다면, 리스트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작곡가처럼 느껴졌죠. 그런 면에서 리스트를 다루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하나의 전환점처럼 다가왔습니다.

‘연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선우예권이 발견한 리스트는 어떤 인물인가요?

제게 리스트는 ‘번역가’에 가까운 존재예요. 노래와 오페라, 문학은 물론이고 인간의 내면까지도 피아노라는 언어로 풀어내는 작곡가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번 작업에서 새롭게 느낀 점은, 리스트의 화려함과 그 이면에 자리한 섬세하고 내밀한 감정이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강렬한 에너지보다 그 안에 담긴 호흡과 말의 억양 등이 훨씬 더 중요하게 다가왔습니다.

리스트의 성악 편곡과 오페라 패러프레이즈처럼, ‘노래’와 ‘드라마’가 두드러지는 작품들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피아노가 어떻게 노래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했어요. 리스트의 성악 편곡과 오페라 패러프레이즈는 단순한 편곡이 아니라, 원곡의 감정과 서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하는 작업입니다. 피아노가 가장 인간적인 표현에 가까워지는 지점이 바로 그 영역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노래’와 ‘드라마’라는 키워드에 집중하게 되었죠.

‘리스트’(2026)

결국 ‘노래한다’는 감각이 핵심일 텐데, 형체 없는 목소리를 피아노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나요?

‘호흡’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단순히 음을 매끄럽게 잇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 노래하는 사람이 어떻게 숨을 쉬고 문장을 만들며 감정을 전달하는지를 피아노로 옮겨보려 했어요. 기술적으로는 페달의 깊이와 음의 길이, 프레이징의 미세한 타이밍 같은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고요. 덜어낼수록 오히려 더 많은 소리가 들린다고 느껴져서, 때로는 라이브 무대보다 더 절제된 해석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슈베르트의 숨결에서 리스트의 광기까지

©Rohsh

1부에 슈베르트의 최후기 소나타 중 하나인 20번 D959를 배치한 점이 인상적입니다. 2부의 리스트와는 어떤 연결고리를 갖나요?

슈베르트는 이 프로그램의 ‘출발점’과도 같아요. 그의 음악에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내면의 노래’가 담겨 있고, 그 세계가 2부의 리스트로 넘어가면서 보다 극적이고 외적인 표현으로 확장됩니다. 특히 슈베르트(1797~1828)가 가진 선율적인 사고와 시간의 흐름이 리스트(1811~1886)의 음악 안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 지점이 두 작곡가를 하나의 서사로 묶어주는 중요한 축이 되었습니다.

표현 방식이 다른 두 작곡가를 하나의 호흡으로 묶어내는 기준이 있다면요?

겉으로 보이는 방식은 달라도, 두 작곡가는 ‘노래’라는 본질에서 깊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슈베르트가 내면에서 길어 올린 감정을 정제된 형태로 보여준다면, 리스트는 그것을 밖으로 꺼내 극대화하죠. ‘내밀한 독백’과 ‘무대 위 드라마’로 이어지는 하나의 큰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2부는 리스트의 ‘리골레토 패러프레이즈’로 시작해 ‘헝가리 광시곡’ 2번, ‘메피스토 왈츠’ 1번으로 이어집니다. 꽤 치밀한 드라마가 연상되는 구성입니다.

2부 전체를 거대한 드라마처럼 구성해보고 싶었습니다. 오페라적인 긴장과 유혹이 감도는 ‘리골레토 패러프레이즈’로 시작해, 민족적인 에너지와 즉흥성이 분출되는 ‘헝가리 광시곡’을 지나, 마지막에는 ‘메피스토 왈츠’의 광기와 초월적인 상태까지 나아가는 흐름을 떠올렸어요. 각 곡이 독립적이면서도, 뒤로 갈수록 에너지가 팽팽하게 확장되는 구조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리스트는 오늘날의 ‘리사이틀’이라는 공연 형식을 정립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독주 무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나요?

리사이틀은 연주자가 온전히 혼자서 하나의 세계를 세우고, 전체 프로그램을 통해 이야기를 완성하는 가장 개인적인 무대라고 생각해요. 템포와 구조, 서사를 모두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에 자유로운 만큼 책임감도 크죠. 이번 투어에서는 곡과 곡 사이의 연결과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건반과 마주하며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결코 타협하고 싶지 않은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을 때는 그저 음악이 좋아서 쳤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때보다 고민도 책임감도 훨씬 무거워졌지만, 그 시절의 순수한 감각을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주자로서 가장 지키고 싶은 가치는 ‘정직함’입니다. 음악적으로 무엇이 맞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되, 유행이나 외부의 기대에 휘둘리기보다 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을 해나가려 합니다.

올해 남은 공연 계획과, 앞으로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레퍼토리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이번 투어를 잘 마치는 게 우선이고, 이후 오케스트라 협연과 실내악 프로젝트들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한 작곡가를 깊이 탐구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다시 초기 고전주의로 돌아가 보거나, 현대 레퍼토리로 시선을 넓혀보는 것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홍예원 기자 사진 마스트미디어

 

선우예권(1989~)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커티스 음악원·줄리아드 음악원·매네스 음대에서 수학했다.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베른트 괴츠케를 사사했으며, 2017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데카 레이블에서 ‘모차르트’(2020), ‘라흐마니노프, 리플렉션’(2023)을 발매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선우예권 피아노 독주회
5월 15일 익산예술의전당 | 5월 16일 대구 달서아트센터 | 5월 20일 성남아트리움
5월 21일 창원 성산아트홀 | 5월 22일 울산중구문화의전당
5월 24일 양산문화예술회관 | 5월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 D959, 리스트 ‘리골레토 주제에 의한 콘서트 패러프레이즈’·‘헝가리 광시곡’ 2번·‘메피스토 왈츠’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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