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줄리아드 유학 시절 생각나죠?”
베를린 필 내한 첫날 리허설을 앞두고, 오주희는 마르틴 뢰어의 음악 인생을 길게 파고들었다
11월 11일, 베를린 필 첫 공연 날 하프시코드 연주자 오주희는 베를린 필의 첼로 수석 마르틴 뢰어를 만났다. 둘은 1989년 줄리아드 음대에서 처음 만났다. 헨델 오보에 소나타에서 두 대의 콘티누오를 각각 맡아 연주했는데, 오주희는 단순한 베이스라인을 연주하는 마르틴 뢰어의 소리를 듣고 단번에 빠져들었다. 마르틴 뢰어는 오주희의 졸업 연주에 친구들을 대동하여 앙상블을 도와주기도 했다. 학업을 마친 후 오주희는 귀국해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하프시코드 연주자가 되었고, 마르틴 뢰어는 독일로 돌아가 베를린 필 첼로 수석이 되었다. 그리고 2005년, 베를린 필 첼로 수석으로 내한한 마르틴 뢰어와 재회했다. 그 뒤로 서로 자신의 나라에 방문할 때마다 안부를 물으며 우정을 쌓아왔으며, 이번 내한 때는 오주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서울 금호아트홀(11월 21일)과 대전 문화예술의전당(23일)에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공연, 그리고 부천 필(29일)과 협연 무대를 성사시켰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나이 서른에 베를린 필 수석으로 발탁된 행운의 사나이. 내한 첫날 리허설을 앞두고, 오주희는 절반 이상이 베를린 필로 점철된 마르틴 뢰어의 음악 인생을 길게 파고들었다.
줄리아드의 독일 학생
첼로를 만나게 된 계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다섯 살에 피아노를 처음 배웠고 일곱 살이 되어서는 첼리스트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첼로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였으나 내 귀에 바이올린 소리는 너무 높아서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미친 영향은 어느 정도인가?
어머니는 상당히 재능 있는 음악교사로, 아이들마다 각자 발전 단계에 필요한 것을 정확히 짚어내 가르치는 능력이 있다. 이런 능력을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또한 하나의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족에게 배우다 보면 갈등은 있게 마련이지만, 어머니는 내 첫 첼로 선생님이셨고 약 3년간 가르쳐주셨다. 그 후 다른 선생님께 배웠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익숙지 않은 분이라 계속해서 어머니가 감독 및 지도를 해주시곤 했다. 그 덕분에 기본기가 탄탄하게 잡혀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었다.
어머니가 연습을 강요하진 않았는지?
재능 있는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항상 받는 질문인 것 같다. 연주 기술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연습 과정이 필요한데, 아무리 뛰어난 아이라도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일정 부분의 완곡한 강요와 자유의지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 길이 내가 가고픈 길인지 늘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너무 어릴 때부터 이 길로 들어선지라 음악 외에 다른 길도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음악에서 얻는 만큼의 즐거움을 주는 다른 일이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
어머니 외 음악교육에 있어 영향을 준 사람들은 누구인가?
함부르크 음대에서 만난 볼프강 멜호른 선생님을 통해 대부분의 테크닉을 쌓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은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사사한 자라 넬소바 선생님이다. 카살스·퍄티고르스키 등 옛 전통 스타일의 끝자락을 살던 위대한 음악가들을 사사한 분이다. 원래는 쾰른으로 공부하러 갈 예정이었으나 어느 날 마스터클래스에서 넬소바를 만났고, 줄리아드로 오지 않겠냐는 그녀의 제안에 그 자리에서 “예!”라고 대답했다. 1년여에 걸친 준비 후 장학생으로 줄리아드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줄리아드라는 학교 이름이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오직 넬소바 선생님만을 보고 줄리아드행을 결정했다.
베를린 국립음대에서도 공부했는데, 미국과 독일 교육 시스템 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미국 대학의 대부분은 사립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직접 등록금을 내거나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다. 그래서 스스로 주어진 시간의 중요성과 의미를 잘 인식하고 활용하는 것 같다. 반대로 독일 대학은 국가에서 전액 부담해주기 때문인지 열의가 비교적 덜한 면도 있는 게 사실이다. 줄리아드에서 좋았던 점은 사람들의 열정이 넘칠 뿐 아니라 함께 음악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 역시 대단했다는 것이다. 한밤중에도 실내악을 연주하고 싶으면 대여섯 명은 쉽게 불러모아 함께 음악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독일에서는 그런 면이 없어서 아쉬웠다. 독일에서는 학생들이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경향이 더 강했다. 나로서는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느냐였고, 그래서 학교 시스템 쪽으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사실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학교에서 배우는 게 아니지 않나. (웃음)
유럽에서 미국으로 음악 공부를 하러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미국 유학이 본인의 음악적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사실 미국 유학 당시에는 음악적 커리어를 시작하지 않았다. 독일로 돌아와서 2년을 더 공부하고 난 후 미국에서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 유학을 통해 첼로 연주에 대한 통찰이라든지 음악 전반에 걸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다. 어린 나이에 환경이 바뀌면 여러 면으로 크게 영향을 받는다. 내 뉴욕 생활 역시 음악적·개인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오디션에 합격 못한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가지에만 매달려서
‘그 길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절실함보다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심적 여유를 가진 게
통했을지 모를 일이다
베를린 필 수석으로서의 16년
입단 계기 또는 배경은 무엇이었나?
우연적이었다. 그때 나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오디션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아직 나는 공부 중이었고, 내 갈 길에 대해 숙고해보지 않은데다 트리오 및 솔로 활동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베를린 국립음대의 볼프강 보엣처 교수님께서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 첼리스트 자리가 났으니 오디션을 한 번 보라”고 하셨다. 그럴까 생각도 했는데 오디션 당일 몸이 아픈 바람에 가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후 오디션을 또 한다는 거다. 알고 보니 그 자리가 계속 공석이었다. 오디션에 가면서도 별 기대는 없었다. ‘이걸 꼭 해야겠다’는 간절함은 없었다.
준비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더 준비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디션에 합격 못한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컸다. 평생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연주 몇 번 해본 것 외에는 오케스트라 경험도 없었으니 말이다. 오디션 후에도 내가 잘한 건지 아닌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합격 소식을 듣고도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난다.
오디션 곡목 중에는 오케스트라 발췌곡도 있지 않았나? 경험이 많이 없었으면 발췌곡 연주가 쉽지 않았을 텐데.
사전에 지정곡들을 연습하긴 했다. 하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은 발췌곡에 큰 중점을 두지 않는다. 특히 수석단원 오디션에서는 거의 독주곡을 연주한다. 심사위원들은 연주자의 실력과 인품을 중요하게 본다. 오케스트라 연주곡은 입단하면 당연히 잘하게 될 테니 말이다.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려고 열 번 스무 번 시도해도 안 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인 듯하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너무 한 가지에만 매달려서 ‘그 길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절실함보다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비교적 심적 여유를 가지고 접근한 것이 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할애하는 시간이 상당할 텐데, 나머지 솔로나 실내악 활동 일정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소규모 오케스트라들은 당장 다음 해 일정도 정해지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인 반면 베를린 필하모닉은 최소 3년간의 일정이 확정되어 있다. 그래서 개인 활동 일정을 세울 때면 우선 오케스트라 사무실에 가서 일정을 확인한 후 여유 시간을 내 소속사에 알려주면 된다. 물론 내 개인적인 시간은 줄지만, 하나에만 치중하지 않고 양쪽 활동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은 즐거운 일이다. 오케스트라를 통해 얻는 것은 굉장히 많다. 다양한 작곡가와 지휘자, 연주자들부터 배우는 경험은 정말 놀랍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내 솔로 및 실내악 연주뿐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친다.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의 질적인 면에서 볼 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홀에서의 연주가 투어 연주보다 낫다는 평이 있다.
당연히 늘 연습하므로 익숙한 홀이기에 그 공간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홀마다 울림이 다르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방문해서 연주 한 번으로 끝내는 경우라면 연주의 질이 비교적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우리 연주를 듣겠다고 베를린까지 올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어쿠스틱이 좋은 홀들이 베를린 외에도 많이 있다.
여행과 시차로 인한 피로가 연주에 영향을 주는가?
물론 그럴 수 있다. 시차 피로감은 계획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내가 처음 수석 첼리스트로 오케스트라에 합류했을 때, 나는 이미 개인 연주 활동도 하고 있었다. 한번은 오케스트라 투어 일정을 마치고 곧바로 호주로 날아가서 도착 당일 트리오 연주를 해야 했던 적이 있다. 시차는 무려 10시간. 그래도 잘 해야 하지 않나. 그날도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시차에 따른 컨디션 난조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죽을 만큼 피곤할 때도 있고, 괜찮을 때도 있다. 시차는 누구나 경험하기 때문에 각자 알아서 잘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요즘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가 바로 오케스트라마다 가진 고유의 소리다. 베를린 필이 지휘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가?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혼합적 요인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 세대로부터 개발돼 전해 내려오는 오케스트라만의 전통적 소리와 정신이 있다. 예전에는 솔로 연주자나 오케스트라는 첫 한두 음만 들으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카살스나 하이페츠 같은 아티스트들도 각자 독특한 소리를 지 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바로크부터 고전 스타일까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바로크 음악과 브람스 작품의 연주가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오케스트라들은 다양한 스타일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크게 발전했다. 동시에 각자의 고유함을 잃었다. 물론 베를린 필하모닉 같은 경우는 작곡가가 요구하는 풍부하면서도 어둡고 장엄한 사운드를 만들 수 있다.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빈 필하모닉의 소리는 또 다르다.
영화 ‘Trip To Asia’에서 한 젊은 여성 단원이 인상 깊은 말을 한다. “지휘자들은 왔다가 가지만 단원들은 그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오케스트라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단원들의 몫이다.” 이런 주인정신이 신입 단원에게 전달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런 정신은 무의식에 저절로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항상 그 오케스트라만의 연주 스타일을 접하고, 고참 단원으로부터 오케스트라의 40여 년 전 이야기를 듣게 되면 자연스레 주인정신이 생기지 않겠는가.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면 120명과 함께 호흡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오케스트라와의 호흡법은 개인적으로나 작은 그룹이 호흡하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소규모일 때는 즉각적으로 호흡할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는 하나의 거대한 생물체가 호흡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오는 오케스트라만의 깊고 풍부한 소리는 혼자서는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사이먼 래틀 두 명의 지휘자와 함께 했다. 두 지휘자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 둘은 정말 완전히 다르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굉장한 실력가들이라는 사실 정도다. 우선 아바도와는 말러와 쇤베르크 연주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바도는 말수가 적은 대신 직관에 의지를 많이 하는 편이다. 또한 즉석에서 영감을 얻어 창조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반면 래틀은 진정한 노력가다. 자신이 원하는 바와 그를 이루기 위한 방법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위트 넘치는 음악가이며, 특히 바로크와 클래식 음악의 이해 및 연주가 탁월하다. 하이든의 경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지휘자는 판이한 접근법으로 위대한 음악이라는 같은 곳에 이른다. 누구의 방식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다를 뿐이다.
래틀이 2018년 계약이 만료되면 연장하지 않고 떠나겠다고 발표했다. 단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물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만 죽을 때까지 하고 싶지 않고, 다른 길도 걷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고맙게도 래틀이 다음 지휘자가 맡을 때까지 3년 내지 5년이라는 충분한 전환의 시간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다. 떠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 이제 우리는 새 지휘자를 찾기 위해 몇몇 지휘자와 함께 초청연주회를 갖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긴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단원들의 마음을 독려할 수 있는 외부 요인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정치적 지원 같은 것을 의미하는지? 내 생각엔 이건 결국 ‘기브 앤 테이크’의 문제다. 오케스트라는 대중에게 주기도 하지만 받는 것도 있다. 그래서 사이먼 래틀이 교육 프로그램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는 “우리는 사회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받는다. 이제는 우리가 돌려줄 때다”라고도 말했다. 거창하게 사람들의 교육이나 갈 길을 바꿔놓겠다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서로 주고받는 선순환이 깨질 때 문제가 생긴다고 본다. 오케스트라 단원이라고 돈 받고 앉아서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소통하고 교류해야 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의 16년 동안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인가?
오케스트라 연주의 매력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의 일부가 되어 전체의 흐름에 나를 편안하게 맡길 때가 있다. 물론 때로는 혼자서, 또는 실내악 연주를 할 때도 그런 순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와 갖는 그런 경험은 마치 망망대해로 내가 녹아드는 느낌이다. 아바도와의 말러 연주, 또 정말 다르지만 같은 정도의 희열을 느끼게 해준 래틀과의 베토벤과 하이든 연주가 그랬다. 음악가라면 누구나 연주가 갑자기 평소와는 다르게 훨씬 쉽고 순조롭게 흐르는 느낌을 받은 적 있을 거다. 걱정은 어느 순간 놓아버리게 되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희망을 되찾는다. 그 희망으로 좀 덜 만족스러운 연주를 한 후에도 다시 전진할 힘을 얻는다.
경기침체로 인해 여기저기서 오케스트라와 오페라극장에 대한 예산 삭감 소식이 들린 베를린 필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아무래도 다른 곳보다는 덜하리라 본다. 특히 독일은 전통을 자랑하는 오케스트라가 많다. 물론 독일에도 예산 문제로 인한 논란과 갈등이 있다. 예산 삭감에 있어서는 문화예술 부문이 일순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예산은 한 번 깎이면 영원히 깎인다는 거다. 원상 복구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고 있다. 아마 예산 삭감의 영향은 베를린 필하모닉이 가장 나중에 받지 않을까 싶다.
클래식 음악회 관객 수가 줄고 있다. 베를린 필도 같은 상황인가?
아직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은 96퍼센트의 티켓 판매율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전체적으로 상황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여기에는 경제·교육 등 여러 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초등교육 시스템에는 음악 수업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음악을 모두 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꼭 소비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에게나 클래식 음악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어떻게 자기 삶에 적용할지는 관객의 몫이다. 관객이 적다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누구에게나 충분한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해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 경험을 어떻게 자기 삶에 적용할지는 관객의 몫이다. 관객이 적다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충분한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해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외부로부터 정보를 너무
많이 받지 않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외부적
요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나에 대한 통찰을 하는 것이다. 유튜브 같은
매체의 능력과 가능성이 엄청나지만, 그 이면에는 위험도 따른다
한 명의 첼로 연주자로서의 삶
책벌레라는 얘기가 있던데, 독서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나는 특히 물리와 관련한 책을 좋아한다.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나는 정해진 답이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또 하나의 새로운 열린 답이 되는 거다. 과학도 열린 의문들이 많다. 정해진 답이 없기에 답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실험이 필요하다. ‘답은 이거다’라고 결론을 내려버리는 순간 중요한 걸 잃게 된다. 곡 파악을 완벽히 했다고 생각하다가도 갑자기 ‘어, 이건 뭐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건 전혀 몰랐는데’ 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빨리 늙지 않고 활력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커리어를 선택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본 적 있나?
물론이다. 나는 항상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연주 활동을 해야 감을 잃지 않기 때문에, 학생을 많이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만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생이라면 학생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해야 하지 않나. 내 경험을 돌아보면, 가르치는 일이 보람되긴 하지만 항상 학생 수는 아주 적었다. 그리고 솔로 연주자로서의 길만 걸어야 했다면 연주 여행과 같은 레퍼토리 연주의 무한 반복이 아니었을까. 물론 솔로 연주자만의 좋은 점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장기적으로 볼 때 여러 활동의 조합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이번 주는 트리오 연주자, 다음 주는 솔로 연주자, 그리고 다음 몇 주는 오케스트라 연주자. 간간이 가르치기도 하면서 말이다.
향후 보다 깊이 연구하고픈 레퍼토리는 무엇인가?
수도 없이 많다. 열 곡만 뽑아서 연구한다 해도 평생 할 수도 있다. 현대음악에도 관심이 있는 편이다. 내가 지금 한국에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전부터 윤이상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해보고 싶었다. 펜데레츠키의 첼로 협주곡도 시도해보고 싶다. 전통 레퍼토리만 해도 연주해보지 않은 것들이 많다. 베토벤 트리오도 시도해보지 않은 곡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음악인생 동안 참고서 역할을 해준 작곡가 또는 음악가가 있나?
어릴 때는 내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이 사람의 영향을 받아 따라가다가 갑자기 ‘어, 이건 내가 아닌데’ 하고는 돌아서서 또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기도 했다. 지금도 내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을 연구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나아가는 방향이 어디인가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외부로부터 정보를 너무 많이 받지 않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옛날 인터넷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오늘처럼 많은 정보와 문화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인 발전의 기회는 훨씬 많았다. 물론 오늘날 유튜브 같은 매체의 능력과 가능성이 엄청나지만, 그 이면에는 위험도 따른다. 자라 넬소바는 지금까지도 내게 중요한 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이 선생님과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곡가들 중에서도 본인이 쓴 곡의 악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쓴 곡은 특히 재미있다. 첼리스트는 지극히 첼로적으로, 피아니스트는 지극히 피아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의 틀을 깨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때도 있다. 그런 음악가들이 내게 좋은 영향을 준다.
현존하는 첼리스트 중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경이로운 연주력을 가진 첼리스트들이 많다. 최근에 파올로 판돌포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비올라 다감바로 연주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마치 그곡이 원래 자기 악기를 위해 쓰인 것처럼 연주했다. 첼리스트로서는 생각지 못한 접근법을 선보이는 것을 보며 기분이 좋았다. 첼리스트 중에 꼽자면, 아직도 아주 오래전 음반들을 듣는 편이다. 솔직히 말하면 첼로 음반을 많이 듣지는 않는다.
어릴 적 피에르 푸르니에의 바흐를 자주 듣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푸르니에는 가장 뛰어난 프랑스 첼리스트 중 한 명이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가?
한 가지 확실한 건 지휘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많이들 “20년 후면 지휘를 하고 있지 않겠나”라고 추측하는데.
하하.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다. 토스카니니를 비롯해 연주자에서 지휘자로 전환한 사람들은 거의 다 젊은 나이에 커리어를 바꾸었다. 지휘를 하려면 박자를 젓고 음악적 표현을 하는 것 외에 얼마나 필요한 것이 많은지 너무 잘 안다. 그래도 20년 뒤에 내가 또 완전히 다른 소리를 하고 있을지 누가 아나.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찾는 것은 자유다. 원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생각의 틀에 갇히지 않는 것. 그럴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험을 더 하기 위해서 내가 음악가로서 연주하고 여행하는 게 아닐까.
하프시코드 연주자 오주희는 한양대 음대를 졸업한 후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와 줄리아드 음악원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서울바로크합주단 단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독주 및 실내악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정리 김여항 객원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