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로 펼쳐낸 우리의 땅

‘새벽·국토·자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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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 김준권 ‘취죽靑竹-1302’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 수행자의 마음으로 파고, 찍은 것은 산으로 솟아나고 강이 되어 흐르고 울창한 숲이 되었다. 글 김선영 기자(sykim@)

밉지 않은 찬바람에 작은 새싹이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유채꽃도 벌써 피었다. 얼기설기 쌓아올린 미술관 돌담 안에는 푸른 대나무 숲이 펼쳐졌다. 그림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노랑과 초록으로 선명한 대나무 숲을 사뿐히 흔들고 있다. 어디선가 마음을 말갛게 씻어주는 소리도 들려온다.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 멈춰 있는 그림을 바라보며 심연으로 깊이 들어가는 내밀한 시간을 가져본다.
제주현대미술관이 2013년 신년특별기획으로 국내 판화가 3인의 ‘새벽·국토·자연’ 전을 연다. 제주시 한경면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자리 잡은 제주현대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새벽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온 제주 출신 강승희 작가의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어둠을 밝히는 새벽빛은 독도부터 백두산까지 온 땅 구석구석을 비춘다. 작가는 나무 사이에서, 광활한 대지 위에서 새벽을 맞이한 순간을 정적이면서도 고독한 분위기 속에서 보여준다. 작품 속 새벽이 동시에 품어낸 밝음과 어둠은 보는 이로 하여금 판화인지, 수묵화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강승희 작가는 금속판 위에 직접 만든 특수한 송곳과 칼로 선을 새기고 점과 구멍을 만드는, 부식동판화기법으로 작업을 한다. 단단한 금속에 작가가 입힌 흔적은 그 깊이와 물감의 압력, 시간의 차이를 통해 서로 다른 번짐과 점묘로 드러난다. 수묵산수화에서나 볼 수 있는 농담의 효과를 판화 작업에서 구현한 것이다. 여기에 수묵화와는 다른 깊이의 질감과 밀도, 무게감은 오랜 시간 이어온 수행의 발현이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우리 국토를 주제로 작업하는 김억 작가의 목판화는 세밀하다. 전시장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도록 설치한 ‘제주 천제연폭포’는 흐르는 물결의 낱낱까지 극세하게 표현하면서 입체적인 정경까지 놀라울 정도로 담아냈다. ‘일어나는 땅 운주사’는 전남 화순군에 위치한 운주사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펼쳐냈다. 운주사 곳곳에 자리 잡은 지물이며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숲과 산새는 어릴 적 보았던 대동여지도를 연상시키며 압도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김억 작가의 목판화에 담긴 세밀함은 역사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담보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이것은 ‘동방의 아침에 해를 맞는 독도’에서도 드러난다. 수평선 너머에서 해가 솟는 장면을 표현한 작품은 외로움과 싸우고 고독감을 이겨온 섬의 세월을 돌섬인 독도의 거친 결과 파도의 잔잔한 출렁임으로 생생하게 표현했다. 여기에 주홍색으로 홀로 채색된 태양은 독도를 비추는 희망과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다채로운 색감을 지닌 김준권 작가는 수묵목판화 작업을 통해 내면의 심상과 정서를 표현한다. 한국의 선각 목판화, 일본의 다색 목판화인 우키요에, 중국의 수인판화를 섭렵한 작가가 선택한 작업 방식은 다색 수묵목판화다. 이것은 여러 개의 판을 판각한 한지에 먹이나 수성 안료로 찍는 묽은 수성목판화로, 먹의 농담에 따라 그 판의 개수를 늘려나가는 방식이다. 작가는 우리나라 고대 목판인쇄의 과정을 회화적으로 응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모노톤의 수묵목판과 다색 수묵목판으로 작업한 김준권의 작품들은 회화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취죽靑竹-1302’에서 작가의 칼 끝 하나하나에서 태어난 대나무 잎은 마디마디 무성하게 자라 숲을 이뤘다. 대나무 위에 대나무, 대나무 곁에 대나무가 들어차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마음을 시원케 한다. 그의 또 다른 대나무 숲은 한겨울 홀로 하얀 달빛 아래 그 숨을 죽이고, 한결 힘을 뺀 짙은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잎사귀에 은은하게 묻어난 달빛. 숲은 달을 향해 있다. 작품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숲 속 어디쯤엔가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김준권 작가의 대나무 연작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초대한다. 작가는 푸른빛이 맴도는 첩첩산중의 풍경도 보여준다. 그림 속 하늘 아래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새는 무겁거나 험하지 않다. 우리 땅 어디엔가 있을 듯한 풍경은 곧 작가의 여유로운 내면세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늘 위로 한 마리 새가 고요히 날아가는 그 마음은 그저 평온하다.
김준권 작가는 “단순한 반복 작업이 참으로 지겹다. 노동 강도가 만만치 않아 몸이 고달프다“라는 말을 작가 노트에 썼다. 하지만 세 명의 작가 모두가 판 것은 단순히 나무며, 동판만이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 칼이며 송곳으로 하나하나 파고 찍은 것은 심중의 애환과 고독함이다. 그래서일까, 손쉬움과 빠름을 외치는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 작가가 펼쳐놓은 판화의 연금술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로 다가온다.
3월 19일까지, 제주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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