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와 최예은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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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6월 1일 12:00 오전


▲ 뮌헨에 있는 무터 재단의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안네 조피 무터와 최예은

바이올린의 거장 예후디 메뉴인은 “삶은 끊임없는 교류의 연속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삶은 우리를 조각하는 조각가이며, 우리 모두는 그의 손에 의해 하나의 특별한 예술품으로 거듭나 완성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예술가는 예술을 창조하는 주체인 동시에 그 자신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 완성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던 그가 자신의 두 후배 음악가를 만났다면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글 장동선(뇌인지과학자) 사진 Frank Schmidt

전날 내린 비가 개인 어느 월요일, 산뜻한 봄날에 어울리는 두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와 최예은을 독일 뮌헨에서 만났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조각 같다고 칭찬하기에는 너무나 활기가 넘치는 두 사람은 은근히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나이와 문화 차이를 넘어서 둘 사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음악과 삶에 대한 많은 질문을 품은 어린 후배에게 한때 같은 질문들을 경험했을 선배는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대답을 풀어놓았다. 이하 안네 조피 무터와 최예은의 일문일답.

왜 음악을 선택했나. ‘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고 결심한 특별한 순간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난다. 어머니께서 빨래를 개고 있었는데, 내가 말했다 “내 다섯 번째 생일선물로 바이올린 교습을 받고 싶다”라고. 그때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셨던 것 같다. 물론 부모님 집에서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듣긴 했다. 부모님은 서로에게 약혼 선물로 예후디 메뉴인이 연주하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멘델스존과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LP를 선물했을 정도니까. 그것이 결국 내가 음악을 선택하게 만든 것 같고….
어쨌든 다섯 살 때 바로 바이올린을 시작하지는 못했다. 부모님께서는 아무래도 이웃이 신경 쓰이셨던 것 같다.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하면 마치 병든 고양이가 낑낑대는 소리가 나지 않는가. 물론 나의 경우는 고양이가 병들지 않았던 것 같지만. (웃음) 어쨌든 먼저 피아노를 시작하고, 6개월 후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다. 다섯 살 반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는데, 여섯 살에 첫 번째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대회가 분명히 기억난다. 모두가 엄청 흥분했던 것 같은데, 사실 나는 그런 걸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연주하고 싶었을 뿐이다.
젊은 시절에 특별히 존경하거나 본받고 싶었던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다비트 오이스트라흐로부터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여섯 살 때, 단 한 번 라이브로 그의 연주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의 국경 지대에 가까웠던 도시 바젤에서였다. 그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연주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무대 위에서의 어마어마한 존재감, 그의 따뜻한 인격, 그리고 마치 포옹과도 같았던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소리.
나탄 밀스타인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죽기 전, 이미 팔십 세가 넘었을 때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나이든 거장들의 세대를 요즘 어린 세대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세대의 거장들은 요즘 시대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어떠한 고귀함, 표현의 순수함, 단정한 겸허함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한 작품의 새 레코딩이 나오면 그것이 40년 전의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술에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해석의 수준을 적어도 아이작 스턴·나탄 밀스타인·다비트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거장들의 수준으로 올리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오이스트라흐는 물론 내게 가장 모범이 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바이올리니스트다. 나의 두 번째 선생님인 아이다 슈투키는 열 살 때 처음 만났는데, 아직까지도 내게 가장 본보기가 되는 분이다. 음악인으로서, 선생님으로서, 여성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그분은 완벽했다.
무터 선생님도 내게는 완벽하다!
고맙다! (웃음)
이미 35년을 국제무대에 서왔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별한 음악인의 삶을 살아왔는데, 아직도 음악인으로서 흠모하고 본받고 싶은 대상이 있는지 알고 싶다.
‘흠모한다’거나 ‘본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유럽인이 이해하는 예술의 범위 안이라면, 예술에 있어서 모방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각 개인의 독창적인 접근을 원한다. 따라서 옛 거장들을 흠모하는 존경심과 나 자신만의 표현 방식을 찾고자 하는 소망 사이에서 바른 균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비유를 하자면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매 산봉우리마다 펼쳐지는 풍경이 다르지 않나. 산을 오르다 보면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또 다른 산꼭대기들이 보인다. 내게는 매 콘서트가 이와 같이 새로운 발전의 계단이다. 정말로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매번 새로운 것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발전한다. 늘 진행형인 셈이다. 음악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는 성공으로 가는 단 하나의 길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성공적이고 좋았던 접근 방식을 과감히 버리는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만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


▲ ⓒFrank Schmidt

나도 그렇게 느낀다. 무터 선생님을 보면서 배운 바도 많다. 본인이 쉬는 날에도 다른 음악인의 콘서트를 보러 다니고, 늘 새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본다.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 같다.
아주 중요하다. 예술 밖에서 영감을 얻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젊은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무대 위에서 공연만 하는 고립된 연주자가 되지 않고, 사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고아원이나 양로원도 방문하고, 자선 공연도 해보기를 권한다. 진정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성숙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대 위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하기 위한 연주 기계나 다름없다. 자신만의 진정한 인격을 찾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공허해질 것이다.
예술 밖에서 영감을 준 인물은 누가 있나.
지금은 아흔이 넘은 나의 목사님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수류탄에 맞아 두개골 위쪽이 완전히 파열되신 분인데, 금속 합판으로 두개골을 대신하는 큰 수술을 받으셨다. 그 후로 1급 장애인 판정을 받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목사로 활동하며 다른 장애인들이나 노인들, 불쌍한 사람들을 도왔다. 장애로 인해 받게 되는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 믿음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분이다. 자기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신 그분의 자비심과 인정, 윤리심 앞에서는 정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분을 보고 일찍부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계기로 루마니아나 백러시아에 고아원도 짓고, 이번 일본 쓰나미 사태에서처럼 큰 자연 재앙을 겪은 지역을 찾아가 자선 공연도 하는 등 사회 환원 사업을 해오게 되었다. 내게는 음악인으로서의 삶 외에 노인이나 장애인 등 사회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내 생각에 음악가는 별로 타의 모범이 되는 직업이 아니다. 나 자신의 테크닉을 계발하고 완성하는 등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금방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다. 바로 그렇기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각을 넓히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와, 오늘 배우는 것이 정말 많다!
이런 건 많이 배워도 좋다. (웃음)
어렸을 때의 경험을 묻고 싶다.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하면 늘 바로 성공할 수 있었는지. 호니히베르거나 슈투키 같은 선생님들의 도움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
선생님들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처음 4년은 내가 완전 초보자였으니까. 하지만 두 분 다 카를 플레슈에게 배웠고, 테크닉이 같았던 점이 유리했다. 나의 첫 선생님은 약간 1970년대의 히피 같은 느낌이었다. 베를린에서 온 분이었는데, 삶과 성격이 조금 특별하셔서 눈에 띄었다. 거북이나 토끼, 강아지를 비롯해 엄청나게 많은 동물들과 함께 큰 집에 사셨고, 약간 ‘닥터 둘리틀’(‘닥터 둘리틀 시리즈’의 괴짜 수의사)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분이 수업하는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수업하는 시간과 자유 시간의 조합이 특별했다. 한 30분 정도 같이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난 다음에는 오전 내내 정원에서 동물들과 함께 뛰어 놀았다. 자유로운 놀이와 교육의 조화가 완벽했다. 나는 엄하게 규율을 지키는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아이들은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놀이하듯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내 레퍼토리는 두 번째 선생님인 슈투키 밑에서 발전했다. 처음 4년 동안은 작은 에튀드나 소곡들을 중심으로 배웠는데, 슈투키 선생님은 요구하는 레벨이 훨씬 높았다. 당연히 실패의 경험을 많이 했다. 하지만 실패 없는 삶은 없다. 영화 ‘배트맨 비긴즈(Batman Begins)’를 기억하는가? 거기에 정말 멋진 대사가 있다. “우리가 쓰러지는 이유를 아는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다.” 실패는 삶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다만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당장은 너무나 어려워 사면초가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긍정적인 것을 얻어내는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긍정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정당한 의문점을 가지는 방법, 즉 자기 스스로를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열세 살 때 카라얀을 만나는 큰 행운을 얻었다. 그가 이끌어주는 대로 차례차례 모차르트·멘델스존·브루흐 등 레퍼토리들을 개발해 나갔는데, 내가 열다섯 살 때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길 원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카라얀이 원하는데 연주를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반년 후에 카라얀을 만나기 위해 루체른에 갔는데, 카라얀은 아무 말도 없이 듣다가 내가 서른 마디도 연주하기 전에 내 연주를 멈췄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년에 다시 와.”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말? 카라얀이 말한 것이 그게 다였나? 내년에 다시 오라고? 다른 설명도 없이?
그렇다. 그리고 정말 일 년 뒤에 다시 루체른에 갔다. 그때는 오후 내내 같이 연주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은 오후였다. 나는 연주했고 카라얀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오후내 연주를 반복했다. 루체른의 큰 컨퍼런스 룸 안이었는데, 연주가 끝났을 때는 방 안이 거의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너무나 집중해서 연주했기에 그 누구도 일어나서 불을 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아름다운 스토리다.
카라얀에게서 배운 것이 정말 많다. 그가 소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늘 전체를 중심에 두고 만들었다. 작은 디테일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결코 작은 디테일들을 채우는 데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았다.
자신만의 악기를 찾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맞다. 카라얀이 언젠가 그랬다. 이제는 나의 수준에 맞는 악기를 찾을 때가 온 것 같다고.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삶이란 늘 그런데, 자신이 모르는 것은 결코 찾아낼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숨겨진 위험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어쨌든 그가 부탁했기에 여러 좋은 악기들을 주문해서 연주해봤는데, 연주를 해보고서야 좋은 악기가 무엇인지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연주하고 싶은 악기인 ‘에밀리아니’라는 이름의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찾고나서 였다. 이 악기는 너무나 비싸서 원래는 내 고향인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서 돈을 빌려주기로 했었는데, 같은 시기에 주에서 구텐베르크의 성경책도 구입했기에 돈이 모자랐다. 신문이나 미디어에서는 16세 소녀가 대체 왜 그토록 비싼 악기로 연주해야 하는지 말이 많았고 결국은 아버지께서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리셨는데, 그 이후로 4년간 불안해서 밤에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다. 나중에는 여러 재단이나 기관을 통해 후원을 받으려 노력했지만 그들은 스스로가 음악인이 아니었기에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다. 나는 단지 1~2년을 위해 그 악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평생을 위한 악기가 필요했던 것인데. 그러한 경험을 한 이후에 나는 스스로 재단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보니 나 자신이 재단을 통해 젊은 음악가들에게 무엇인가 후원해주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 됐다.

무터의 이상
나와 같은 젊은 음악가들에게 당신의 재단은 전 세계에서 가장 멋지고 좋은 재단 중의 하나다. 당신이 우리에게 주는 도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도 젊었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무엇보다 카라얀은 정말 좋은 모범이 되었다. 젊은 음악가들에게 멘토는 꼭 필요한 존재다. 그 멘토가 지휘자라면 더더욱 좋고. 요즘은 멘토 역할을 해주는 지휘자가 거의 없어서 안타깝다. 솔리스트에게는 좋은 멘토가 더욱 필요하다. 도움을 받은 음악가들이 다시 다른 음악가들을 돕는 건강한 교류와 순환의 사이클이 필요하다.
당신의 재단에서 후원을 받기 위해서는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젊은 음악인들을 심사할 때는 주로 어떤 점을 눈여겨보는가.
삶은 결코 직선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에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어떻게 발전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 자신도 내가 몇 년 후에, 아니 당장 내일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좋은 음악가를 뽑는 데에 있어서도 확실한 보증수표는 없다. 다만 내가 주로 보는 것은 자신만의 개성과 표현방식을 찾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테크닉도 완벽해야 하지만 그건 대부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표현력·상상력·소리의 감성은 아주 중요하다. 보통 뽑고자 하는 인원수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을 초청해서 연주를 들어본다. 혹시나 내가 못 보고 지나간 재능이 있지 않나 해서다. 인간적으로 특별히 좋아해서 후원하는 학생들도 있다. 솔리스트로서의 가능성은 별로 없어도, 한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인품과 인격이 너무나 뛰어나서 음악계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 생각될 때 그렇게 한다.
사실 연주는 누구나 다르게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특별하다. 음악가도 사람이고, 사람은 모두가 다르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자신에게 늘 질문한다. 내가 일반 관객이라면 이 음악가의 연주를 보기 위해서 저녁에 집을 나와 티켓을 사고 공연장까지 가고 싶을까? 나이가 많고 적고는 사실 상관없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음악을 들었을 때 단 한 순간이라도 너무 좋아서 소름이 돋는 그러한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그건 아니다. 지루함과 맞바꾸기에는 음악이 너무 소중하다.
내가 오디션을 보았을 때는 정말로 무터 선생님 앞에서 연주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좀 겁도 났고, 무터 선생님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선생님만이 지닌 특별한 카리스마도 있었고. 나 자신이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
나는 학생들을 볼 때 많은 점을 동시에 보고자 노력한다. 충분한 재능은 있는가? 의지는? 지성은? 한 사람은 다양한 영향을 받고, 수없이 많은 과거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예은을 보았을 때는 먼저 아주 탄탄하고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리의 감성이 아주 뛰어났고, 섬세함과 지성이 잘 조화되어 있었다. 정말로 뜨거운 열정과 의지도 느껴졌다. 나는 예은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지난 시간들이 쉽지는 않았을 듯하다. 부모님을 떠나 먼 타지 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더욱 대견하다.
당신은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35년이 넘게 성공적인 연주 생활을 해왔다. 반면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아주 잠깐 반짝 스타로 떠올랐다가 다시는 이름을 보지 못하게 되는 음악인들도 꽤 있다. 음악적으로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젊은 음악인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자신이 가진 ‘이상(理想)’의 문제다. 물론 삶에서 행운이 좌우하는 부분도 충분히 많다. 하지만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어떠한 이상을 가지느냐다. 어떠한 음악가가 되고 싶나. 어떠한 음악가가 될 수 있나. 꿈을 꾸지 않는 이에게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꿈은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고, 삶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길로 진행되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가로서 다른 사람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면 다르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하고, 내게 주어진 임무를 그저 충실하게 이행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술가는 결코 상업적인 수익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된다. 명품 시계든 드레스든 광고 모델이 되거나 해서도 안 된다. 나는 예술가라는 직업에 대해 약간 고리타분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예술가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예술이라는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존재다. 유명세나 명성, 화려함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예술가의 삶은 상품화되어서도 안 되고, 끝까지 자신만의 삶으로 남아야 한다. 스폰서들의 후원 제의는 호머의 ‘오디세이’에 나오는 ‘세이렌들의 유혹하는 노랫소리’와 같다. 귀를 막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순수한 의무다. 그 길을 갔을 때 굶주리지 않고 그걸로 먹고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신의 선물이고, 감사해야만 하고. 하지만 명성과 화려한 세계의 유혹에 빠지면 그저 기업들의 비즈니스를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다. 예술가·음악인·연주가로서 그건 잘못된 길이다. 나는 늘 나만의 길을 가기를 추구했다.


▲ 6월 무터와 함께 내한하는 더블베이시스트 로만 파트콜로 ⓒHarald Hoffmann/DG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되는데, 그러한 신념을 주변에서 많이 뒷받침해주었는가? 아니면 순전히 혼자만의 선택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었는가?
물론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의 목사님, 선생님, 그리고 순수한 음악의 길을 가는 데에 있어 결코 한 눈 팔지 않았을 여러 거장들의 세대. 이른 나이에 상실의 아픔을 겪는 것도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32세에 남편을 잃었고, 그 후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내 아이들에게 좋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 하면서 동시에 내 인생의 목적인 예술가로서의 나 자신을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것, 그 사이에서 좋은 타협점을 찾기까지 무척 어려웠다. 어쨌든 말하고 싶은 것은 이른 나이부터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면, 불필요한 외부 요소들은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 삶에 있어서 명예와 화려함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일단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쉽다.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게 되면 세이렌이 아무리 달콤한 유혹의 노래를 불러도 나는 귀머거리와 같이 내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요즘의 트렌드는 클래식 음악도 점점 더 많이 상품화되어 가는 것 같다. 젊은 클래식 음악인들도 화려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는 마케팅이 더욱더 중요해지고. 그래서 모델로 활동하는 연주자들도 있고, 외모도 점점 중요해지고. 이런 트렌드를 어떻게 생각하나?
외모가 뛰어난 것이 죄는 아니지 않나(웃음). 내 생각에 완벽한 마케팅의 예는 바로 카라얀이 아닐까 한다. 그는 대중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데 잘 성공했다. 아름다운 부인의 사진, 요트를 탄 사진, 누구나 카라얀을 알아볼 정도로 마케팅에 성공했지만, 정작 자신의 개인 생활을 보호하는 데에는 철저했다. 그것이 바로 ‘홍보(PR)’의 정석이 아닐까 한다.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시키기 위해서는 매스미디어를 이용하고 관중에게 어필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자신 개인의 영역 또한 철저하게 보호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진지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요즘의 신문과 미디어, 방송은 믿을 수 없이 뻔뻔해졌기 때문에, 특히 경험이 아직 얼마 없는 젊은 음악인에게는 그러한 다중매체의 위험을 제때 알아차리고 피하기 어렵다.
사실 레코드 회사들은 젊은 음악인을 지속적으로, 이타적으로 후원하고자 하는 관심이 전혀 없다. 사리사욕을 추구할 뿐이다. 잘 팔리지 않는 음반은 낼 필요도 없고. 그래서 요즘의 젊은 세대는 약간 진퇴양난인 것 같기도 하다. 마케팅에 성공해 자신의 가치를 잘 포장하고, 결국은 잘 팔리는 상품에서 진지한 음악인으로의 변신에 성공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너무나 진지한 모습만 부각되어 마케팅을 할 가치가 아예 없는 음악인이 되어버리거나.
우리는 지금 음악사에 있어서 하나의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깊은 관심 자체가 없는 대중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단명하는 클래식 히트들만 프로듀싱 되고 있다. 단기 판매량만이 모든 것을 좌우할 뿐이다. 나는 이러한 경향이 매우 불안하다. 예를 들어 나이든 세대의 대지휘자들 중에는 레코딩 계약이 아예 되어 있지 않은 분들도 많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적어도 서구사회에서는 큰 약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음악가는 사실 높은 연령에 이르러서야 전 인생을 통해 일구어놓은 음악적 작업의 수확을 거둘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 모두는 젊음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경향 때문에 훌륭한 문화예술 유산들이 소실되어가고 있다.
당신과 같은 멘토를 두어서 정말 행복하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다. 무터 재단에서는 젊은 연주자들을 위해서 새로운 현대음악의 작곡도 자주 의뢰한다고 하는데.
새로 작곡된 곡을 연주하며 더 많이 괴로워하고 더 열심히 음악을 하라고 하는 의미에서다. (웃음) 예를 들어 볼프강 림의 작품들은 연주하기가 믿을 수 없이 어렵다. 몇 시간씩 연습해도 계속 박자를 틀린다. 작곡을 의뢰하는 경우는 더블베이스의 경우처럼 솔리스트를 위한 레퍼토리가 몇 없을 때 주로 그렇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음악적인 이해력이 많이 넓어진다. 나도 늘 새로운 경험을 하고. 그러한 것이 솔리스트로서의 음악적 역량을 늘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솔리스트에게는 자신만의 ‘틈새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도 하고.
요즘 젊은 음악인의 경우는 클래식과 재즈의 조합이나, 심지어 일렉트로닉과 클래식을 조합하는 등 새로운 틈새 시장을 공략하는 연주가들도 많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좋은 음악이 있고 안 좋은 음악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클래식 레퍼토리는 이미 엄청나게 장대하다. 왜 서로 다른 두 장르에 걸쳐 활동해야 하는지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물론 앙드레 프레빈과 같이 두 세계에서 모두 뛰어난 활동을 보이는 음악인도 있다. 하지만 그런 연주자는 매우 드물다. 가끔 적어도 유럽에서 ‘재즈’라는 라벨 아래 연주 되는 것들 중에는 화성의 조화에 있어서나, 음악적 구성에 있어서나 전혀 무의미한 얼빠진 즉흥연주들이 있다. 때로 그것은 듣고 있는 관객에 대한 음악적인 강간에 가깝다고 느낀다. 실력 없는 연주자가 다른 장르의 가면을 쓰고 새로운 상품으로 둔갑한다고 해서 더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터 재단의 학생들과 함께 전 세계 투어를 하고 있다. 유럽과 미주, 아시아의 청중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극동 아시아의 관객은 눈에 띄게 젊기는 하다. 예를 들어 대만의 청중은 특히 젊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대만을 좋아하는 이유인데, 마치 팝 콘서트에서처럼 굉장히 분위기가 즐겁다. 아주 특별한 분위기다.
한국의 청중은 어떤가?
한국의 청중도 유럽보다 젊다. 하지만 젊다고 무조건 더 좋다는 건 아니다. 그저 반응이 더 꾸밈없을 뿐이다. 그것이 음악인으로서는 좋은 것이고.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이렇게 말했다 “옷만 벗으면 우리는 모두가 똑같이 나체”라고.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 사람들은 음악에서나 삶 속에서나 조화와 아름다움, 그리고 사랑의 감동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이 15세이든 50세이든 상관없고, 베이징의 청중이건 뮌헨의 청중이건 상관없다. 음악은 마치 물결처럼 우리의 이성으로 분석할 수 없는 어떠한 곳을 강타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늘 우리의 영혼과 직접 접촉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열정을 삶의 직업으로 선택한 젊은 음악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물론 열정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아주 현실적으로 자신의 기량을 평가하는 능력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러기에 좋은 선생을 만나거나, 부모의 조언을 받거나, 아니면 자기 스스로라도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을 냉철하게 평가한 다음 많은 약점들을 찾아내더라도 ― 16, 혹은 18세의 아직 어린 나이라면 분명 많은 약점들이 발견될 것이다 ―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분명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어떠한 위험? 첫째, 자신이 선택한 예술로 아예 생활을 하고 먹고살 수 없게 되는 위험. 둘째, 자신이 선택한 레퍼토리 안에서 솔리스트로 충분히 많은 콘서트를 할 수 있는 기회가 결코 오지 않을 위험이다. 이 두 가지 위험에 굴하지 않고 음악을 선택했다면, 그 다음에는 음악을 아주 커다란 하나의 꽃밭으로 생각해라. 그 꽃밭 안에서 나의 고향이 될 꽃의 종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삶이 될 수도 있고, 가르치는 삶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유치원 음악 선생님이더라도 자신의 열정을 이른 나이에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신의 화원은 크다. 또한 아무리 커다란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 의지로 시작했다 할지라도 내게 주어진 삶은 선택한 것과는 늘 다를 수 있다. 주변의 자상하고 사려 깊은 조언들이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20세에서 22세의 나이가 된다면 적어도 그 화원 안에서 나만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나 자신의 자아를 충분히 만족시키고, 현실적이기도 하며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그러한 위치와 역할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학생들이 늘 솔리스트의 커리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싫다. 물론 누구나 솔리스트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솔리스트이기 이전에 먼저 음악가다. 음악가이고, 한 명의 인간이고. 스페셜리스트의 자리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도 결코 건강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틀린 선택이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높은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만약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없다면 솔리스트로서 나의 존재 이유가 있는가? 없다! 전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음악인이지, 솔리스트가 아니다. 물론 솔리스트로서 필요한 모든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주 일부의 음악인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조차도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라고, 실내악 연주를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자기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레퍼토리의 이해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르게 해야 한다. “나는 왜 음악을 하는가. 내가 음악을 함으로써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음악은 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 음악을 듣는 사람을 위해,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것이 바로 온 인류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언어의 힘이다. 우리는 모두 조금이라도 더 기량을 쌓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와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결국 그 과정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이다. 관객을 위하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노인들과 아픈 이들을 위하여, 다음 세대를 위하여. 이로써 인터뷰 초반에 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왜 음악을 하는가.”

* 안네 조피 무터와 무터 재단 연주자들이 서는 ‘안네 조피 무터 & 무터 비르투오시’는 6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이번 무대에 서는 무터 재단 소속 한국연주자로는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을 비롯해 비올리스트 이화윤, 첼리스트 김두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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