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베베른, 음악에 대한 끝없는 갈망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7월 1일 12:00 오전

베베른의 음악을 처음 듣는다면 무척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몇 개의 음이 들려오는가 싶다가 음악이 이내 끝나버리니 말이다. 간결하다 못해 너무 짧은 그의 작품 중엔 전곡 연주시간 3분을 넘기지 못하는 곡도 있다. 출판된 작품도 그리 많지 않아서 베베른 작품 전집 악보는 4권이면 충분하고 전 작품을 연주한다고 해봐야 4시간을 넘지 않는다.

베베른의 음악을 글에 비유한다면 산문이라기보다 한 편의 시와 같다. 그것도 난해한 정형시와 같다고 해야 할까! 그의 작품 속 음표들은 12음 음렬기법과 같은 엄격한 틀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주자에게도 베베른의 곡을 연주하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시어 하나에 여러 의미가 복합적으로 들어있듯, 베베른 작품의 음표 하나는 때때로 주제 그 자체가 될 정도로 중요하므로 음 하나를 소리 내기조차 부담스럽다. 그래서 그런지 베베른의 작품을 실제 공연장에서 들어볼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오는 7월 25·26일, KBS교향악단이 베베른의 음악을 연주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이번 공연에선 베베른이 첫 번째로 출판한 작품인 ‘파사칼리아’ Op.1이 연주되는데, 사실 이 곡은 베베른의 작품 중 가장 긴 곡이며, 베베른의 전 작품 가운데서도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유년 시절부터 예견된 음악가의 길

1883년 12월 3일, 오스트리아 빈의 귀족 가문 폰 베베른 가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안톤 폰 베베른. 후에 그는 귀족 신분을 뜻하는 ‘폰(von)’을 생략한 채 그 자신을 그저 안톤 베베른이라고 불렀다. 광산 공학자인 아버지와 열렬한 음악 애호가인 어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 시절은 매우 음악적이었다.

아버지의 직장 문제로 7세 때부터 그라츠에서 생활하게 된 안톤 베베른은 그곳에서 김나지움에 다니며 피아노와 첼로, 음악 이론을 배웠다. 음악을 특히 사랑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베베른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의 누이 로자의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매우 훌륭했으며, 안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피아노를 칠 때 그 옆에 앉아 연주를 들었고 피아노를 쳐보려 시도하기도 했다”라고 전해진다.

1902년, 19세가 된 베베른은 본격적으로 철학과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해 빈 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현대 음악학 분야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 귀도 아들러를 사사한 그는 1906년에 15세기 플랑드르 작곡가인 하인리히 이자크의 ‘코랄리스 콘스탄티누스’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논문을 쓰며 르네상스 음악의 다성음악 작곡법에 대해 익혔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베베른의 관심은 단지 르네상스 음악에 머무르지 않았다. 당시 모든 작곡가들이 그러했듯 청년 시절의 베베른도 바그너의 음악에 흥미를 느껴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지크프리트의 검’(1902)이란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8년 여름부터 지휘자로서 전문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등 빈을 대표하는 고전주의 작곡가와 브람스·레거·쇤베르크·베르크의 다양한 작품들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다.

그중 베베른이 자신의 작품과 매우 다른 스타일인 듯한 말러의 음악을 무척 좋아하고 자주 지휘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지휘자로서의 베베른은 특히 말러의 작품을 즐겨 연주했는데, 말러의 후기 작품, 특히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의 음향은 베베른의 초기작 ‘파사칼리아’에서도 엿보이며, 베베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개의 소품 Op.6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5개의 소품 Op.10에서도 말러 후기 교향곡의 음색을 느낄 수 있다.

 


▲ 베베른과 쇤베르크

쇤베르크와의 만남

베베른이 말러의 음악에 영향을 받게 된 것도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쇤베르크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초기에는 말러의 후기낭만주의 스타일의 작품 경향을 보였던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는 후에 12음 음렬기법, 즉 한 옥타브를 이루는 12반음 모두를 사용한 12음렬을 작품의 기초로 삼아 현대음악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쇤베르크가 베베른과 처음 만난 것은 베베른이 빈 대학에 다니던 1904년으로, 쇤베르크가 후기 낭만주의 스타일에 젖어있을 때였다. 베베른이 1908년에 완성한 ‘파사칼리아’ Op.1은 스승 쇤베르크와의 수업 시대를 마치면서 제출한 일종의 비공식 졸업 작품이다. 베베른의 숙달된 변주 기법뿐만 아니라 그 특유의 독특한 음향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곡이다. 물론 이 곡에선 말러 교향곡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파사칼리아’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이후 쇤베르크가 조성의 중심을 없앤 무조음악과 12음 음렬기법 등을 적용한 작품을 내놓으면서 베베른 역시 스승의 길에 동참했다. 동료 베르크도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좀더 낭만적인 방식으로 12음 음렬기법을 자신의 작품에 적용했다. 결국 쇤베르크와 베르크·베베른은 ‘20세기 음악의 성부·성자·성령’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20세기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 사람 가운데서도 베베른은 특히 순수한 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엄격함과 면밀함을 보여준 음악가다. 쇤베르크가 만들어낸 12음 음렬기법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작곡가로 꼽히기도 하는 베베른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간결하며 고요한 음악으로 다른 작곡가들과는 전혀 다른 음악세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는 베베른을 가리켜 “침묵 속에서 작품을 만드는 승려”라 말하기도 했다.

 


▲ 1922년 8월, 잘츠부르크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작곡가들이 만남을 가졌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베베른 ⓒThe Lahr von Leitis Academy&Archive

침묵 속에 담긴 깊은 음악

실제로 베베른의 음악을 들으면 그 어떤 음악보다도 침묵이 중요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음과 음 사이의 공백, 즉 침묵은 그 자체로 깊은 음악적 의미를 만들어내며, 베베른이 악보에 적어놓은 몇 안 되는 음표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때때로 거대한 관현악곡을 듣고 있노라면 거대하고 복잡한 형식에 치여 음 자체의 아름다움을 간과하기 쉽지만 베베른의 간결 명확한 작품 속에선 음의 아름다움이 단연 돋보인다.

베베른의 음악은 이런 식이다. 클라리넷 주자가 지극히 여린 소리로 한 음을 연주하며 조심스레 음량을 크게 하면, 플루트 주자가 그 음을 받아 다음 음으로 연결해낸다. 어디선가 바이올리니스트가 줄을 퉁기는 소리가 파문을 일으키지만 곧 약음기를 낀 부드러운 현악기의 음색이 귓가를 맴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선율이 여러 악기의 음색으로 채색되는 음색 선율이며, 베베른의 작품을 잘 연주하기 어렵게 하는 요소이기도 한다.

지휘자로서 대단히 명석하고 정확하며 세심했던 베베른의 성품은 그가 완성해낸 작품의 악보 한 페이지만 보아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음표 몇 개가 점점이 흩어져 있는 듯 보이는 그 악보를 보면 베베른의 음악을 가리켜 ‘점묘주의 음악’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하나의 점이 단순히 동떨어지고 독립된 점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다른 점들과 관련을 맺으며 구조적으로 의미 있는 점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점묘주의 회화 작품의 점 하나하나가 전체적인 구조를 완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인 것처럼.

 


▲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베베른 ⓒUniversal Edition

20세기 대표 음악가의 어이없는 죽음

1920년대 초반까지 주로 베를린과 빈 등에서 지휘 활동을 계속한 베베른은 1927년엔 빈 방송 프로그램의 감독 겸 지휘자로서 일하며 이름을 알렸고, 독일과 스위스, 영국 등에서 초청을 받았다. 그는 작곡가로서 다작은 아니었지만 1925년부터 우니버잘 출판사를 통해 그의 작품을 출판하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침략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베베른의 음악은 나치에 의해 ‘타락한 예술’이란 낙인이 찍혔고, 나치의 탄압으로 베베른은 라디오에서의 일자리도 그만두어야 했다. 우니버잘 출판사에서 교열을 보는 단순 작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그 시절, 존경하는 스승 쇤베르크는 미국으로 망명해 그의 곁에 없었고, 동료인 베르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전쟁 기간 중 베베른은 거의 고립된 채 답답한 생활을 해야 했지만 다행히 1943년에 빈터투어에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 Op.30의 초연 무대를 지켜볼 수 있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날 무렵, 베베른은 가족들을 데리고 잘츠부르크 남서쪽, 미터질의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해 9월 15일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날, 암거래를 했다는 혐의를 받은 베베른의 딸의 집이 가택수색을 당하고 있었다. 그때 그 집이 포위돼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베베른은 바람을 쐬러 집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순간 미군 병사가 발사한 오발탄에 그가 쓰러졌다. 병사의 실수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당시 작곡 중이던 3악장의 협주곡은 미완성으로 남았고, 베베른이 평생 작곡한 작품들은 단 네 권의 악보집으로 전해질 뿐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짧은 음악은 그 어떤 음악보다 긴 여운을 남긴다.

1902 빈 대학 입학

1904 스승 쇤베르크와의 첫 만남

1906 음악학 박사학위 취득

1908 ‘파사칼리아’ Op.1 작곡, 지휘 활동 시작

1909 현악 4중주를 위한 5개의 악장 Op.5 작곡

1913 오케스트라를 위한 5개의 소품 Op.10 작곡

1927 현악 3중주 Op.20 작곡

1928 교향곡 Op.21 작곡

1934 9개의 악기를 위한 협주곡 Op.24 작곡

1938 나치 정권에 의한 공직에서의 해고, 현악 4중주 Op.29 작곡

1939 칸타타 1번 작곡

1940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 Op.30 작곡

1943 칸타타 2번 작곡,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 Op.30 초연

194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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