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랑 루즈’

광대의 눈물이 전하는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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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3월 18일 9:00 오전

영화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The show must go on).”

프레디 머큐리가 투병 중 제작한 마지막 노래로 알려져 있는 곡의 제목이기도 하고, 많은 영화와 뮤지컬 등에서 고군분투하는 공연예술가들이 자신과 동료를 다독이면서 흔히 쓰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이 말은 시카고의 극장의 광대 보보가 처음 한 말이라고 전해진다. 보보는 공연을 앞두고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공연을 중단할 수 없어 웃으며 무대에 섰다고 한다. 대신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광대의 웃는 분장 위에 눈물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럼에도’의 좌절과 ‘그래도’의 의지를 함께 품고 있는 이 말은 그 근원을 알고 들어도, 모르고 들어도 왠지 묵직하고 슬픈 정서를 전해준다.

 

복고의 기억상실

뮤지컬과 뮤지컬 영화는 역사적으로 꽤 뿌리가 깊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던 것은 스펙터클하고 경쾌한 뮤지컬 영화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20년대와 1930년대 뮤지컬 영화는 황금기를 누렸다. 1960년대 줄리 앤드루스는 ‘사운드 오브 뮤직’ ‘메리 포핀스’ 등으로 뮤지컬 스타로서의 계보를 이었고,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화니 걸’ ‘마이 페어 레이디’ 등의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는 컬트 열풍의 주역 ‘록키 호러 픽쳐쇼’, 올리비아 뉴튼 존의 ‘그리스’ 등이 인기를 끌었다.

눈에 띄는 작품이 없었던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는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변형된 형태의 뮤지컬이 관객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세기말을 준비하는 1990년대는 우울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로맨틱 코미디와 우울한 미래를 전망하는 SF 영화들이 대세를 이루던 때였다. 1990년대는 과거를 이야기할 틈이 없이 미래를 향해 벅차게 흘러갔다. 1990년대 후반은 세기말의 정서로 기대와 절망을 묵직하게 바닥에 질질 끌고 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21세기가 시작되었다. 낡은 시절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지만, 그 낙관적 전망을 무색하게 할 만큼 일상은 변함없었고, 새로운 100년의 시작은 보잘것없었다. 달나라 여행도 없고, 질병 정복도 없고, 인류의 멸망도 없이 사람들은 지루하고 안온하게, 그럭저럭 살아갔다.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고, 새로운 100년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과거가, 20세기가 좋았다며 말하기 시작했다.

징그럽게 주위를 떠돌았던 가난과 무지와 소통 불능의 시간을 매끄럽게 걸러낸 과거의 기억 속에는 낭만이 미소 짓고 있었다. 어려운 현실을 낭만으로 묻어버리려는 집단 무의식이 이끌어 가는 복고적 정서는 다시 한번 할리우드에 뮤지컬 영화를 불러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2001년 바즈 루어만의 ‘물랑 루즈’는 그런 21세기의 시작, 암묵적 절망과 정백당 같은 복고의 기억상실 속에서 탄생한 영화다.

 

무대 뒤 삶, 그럼에도 삶

사실 뮤지컬 영화는 장르적으로 약간 모호하다. 이 모호함이 때론 매력으로, 가끔은 지루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판타지로 관객들을 설득해 보려 하지만, 대사와 노래, 일상적 움직임과 춤 사이의 간극은 잘 재봉하지 않으면 매우 수줍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극장 뮤지컬의 가장 큰 장점인 뜨거운 현장성과 호흡을 뛰어넘기 힘들다. 바즈 루어만은 ‘물랑 루즈’를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교 클럽으로 설정,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을 영화에 담아 무대와 스크린 사이의 경계를 매끄럽게 이어 붙인다.

‘물랑 루즈’는 무대를 준비하는 무대 뒤 이야기 속에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녹여낸다. 푸치니의 ‘라 보엠’을 연상시키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과 열정의 이야기를 파리 사교클럽을 배경으로 펼친다. 죽음을 앞둔 여성과 남자의 순애보, 관객들이 원하는 복고적 정서와 영화 매체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현란한 카메라 워크와 영화로만 표현 가능한 입체적 정서를 스크린에 투영했다.

스토리는 단조롭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포장은 새롭고 현란하고, 황홀하다. 19세기 프랑스가 배경인데 마돈나의 노래가 나온다. 시대와 장소의 한정된 배경을 거부하는 듯한 노래들은 숨 가쁜 비트로 쿵쾅거린다. 영화에는 공연을 위한 일종의 투자자인 백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배우들이 애쓰는 모습이 나온다. 백작은 작품의 엔딩까지 자기 마음대로 바꾸고 싶어 하는데, 새틴과 크리스티앙은 순결한 그들의 사랑과 작품의 엔딩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그런 투자자와 예술가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슬픈 공감대를 형성한다. 사실 영화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화면 속 인물들이 절대 알 수 없다는 믿음을 지닌, 즉 ‘관음’의 예술이다. 그래서 관객은 내가 훔쳐보고 있다는 순간을 절대 들킬 일이 없다는 유리 벽 뒤에 안전하게 앉아있게 된다. 하지만 극장 환경은 다르다. 종종 무대 위 배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안전한 관객이 아닌, 극장에 앉아 있는 사람이 된다. ‘물랑 루즈’는 그런 영화와 공연의 차이를 인정하고 무대 위 장면과 무대 밖 장면을 현란하게 교차시킨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제 연기를 하는데, 노래와 춤이 시작된 순간에는 마치 객석의 관객을 보듯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때 관객들은 영화라는 극에서 튕겨져 나와 무대 위 공연을 보는 듯한 황홀한 착각에 빠진다.

 

영화에서 무대로, 무비컬 ‘물랑 루즈’

막이 열리는 순간부터 닫히는 순간까지, 우리네 인생을 그대로 닮은 쇼. 그런 쇼를 보여주는 뮤지컬은 충분히 즐길만한 위안의 장르가 된다. 가난한 삶 속에 있지만 꿈을 찾아 떠나는 길에 꽃을 뿌려주는 것 같은 사랑과 동료 예술가들의 끈끈한 우정은, 삶이 힘들어도 끝내 마주 잡은 손이 위로가 된다는 믿음을 전한다. 지금은 주름이 어색하지 않은 중년 배우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의 모습은 화면 속에서 영원한 청춘으로 살아서, 힘겹게 버티고 걸어오면서 너덜너덜해졌을 사람들의 마음을 춤과 노래로 토닥인다. 최근 뉴트로(new+retro)의 시대를 반영하듯 고전 영화가 극장 뮤지컬로 만들어지는데, 무비컬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마릴린 몬로의 ‘뜨거운 것이 좋아’를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은 2020년에, ‘물랑 루즈’는 올해 7월 브로드웨이 알 허쉬펠드 극장에서 개막 예정이라고 한다. CJ ENM이 공동제작자로 참여했다고 하니, 곧 한국에서도 ‘물랑 루즈’를 무대에서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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