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2월 14일 9:00 오전

영화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어떤 그리움 같은 예술가의 삶

가장 행복한 순간을 100이라고 친다면, 대충 51 정도에 이른 삶은 51 정도로 행복한 걸까, 49 정도로 행복하지 않은 걸까?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도 도무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질문 앞에 섰다. 평생 내 편이었던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고, 점점 나이 들어가는 몸과 감각 앞에서 평생 한 가지 일만 당연하게 해왔던 내 인생은 어디에 점을 찍고 있을까? 평생 예술가로 당당하게 살아온 내게 어느 날 무대 공포증이 생겼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나의 두려움을 이 여인은 단번에 알아챈다.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음악평론가다. 어쩐지 그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콤한 미소가 위안이 된다.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속 인생의 ‘에필로그’를 써야 하는 시점에 이른 헨리 콜은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다 카포(da capo): 처음으로 돌아가서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한낱 실수일 뿐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영화가 시작된다. 아내와 사별하고 2년 동안 한 번도 피아노와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헨리(패트릭 스튜어트)는 복귀 무대에서 관중, 언론, 평단, 모든 이에게 최고라는 찬사를 받지만, 무대 위에서 느꼈던 공포와 실수를 되짚으며 괴로워한다. 평생 사랑했던 아내의 죽음과 오직 자신의 연주를 기다리는 수천 명의 관객, 지켜보는 평론가들의 시선이 인생에 대한 회한과 뒤섞이면서 무대공포증이 생겨버리고 만 것이다.
클로드 라롱드 감독은 그의 첫 번째 연출 작품을 통해 음악과 예술에 대한 애정을 진하게 드러낸다. 피아니스트 헨리와 평론가 헬렌이 잡지를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 나누는, 사랑보다 더 깊은 교감을 이야기하면서 예술가의 삶과 예술 그 자체를 소중히 다룬다. 명 클래식 음악 27곡의 피아노 반주가 이어지는 동안 영화는 뉴욕의 명소와 세계적인 극장, 아름다운 대자연의 풍경을 보여준다. 마치 클래식 음악을 위한 90분짜리 뮤직비디오 같다. 그래서 극적인 구성으로만 보자면 인생의 종착역으로 향하는 예술가의 삶, 그 찬란하고 쓸쓸한 이야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멈칫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삶의 다채롭고 쓸쓸한 찬란함을 멜로디로 엮어서 보여준다. 그래서 캐릭터의 깊이나 영화 속 사건보다 여백과 여백 사이를 이어주는 음악의 템포에 집중하면서 예술가와 예술, 그보다 더 예술적인 자연의 풍광을 향한 경외심을 보여준다. 마치 헨리의 고독과 쓸쓸함을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영화 속 피아노곡이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원제목인 ‘코다(Coda)’는 음악용어로, 한 작품 혹은 악장의 끝에 위치하여 종결의 느낌을 선사하는 부분을 의미한다. 문학으로 따지면 ‘에필로그’라 할 수 있는 대단원의 마지막이다. 영화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헨리가 맞이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예술의 가치와 삶 그 자체를 되돌아보는 여정에 함께 한다.

 

테누토(tenuto): 음의 길이를 충분히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는 음악과 풍경이 등장인물이자 이야기이고, 갈등이자 클라이맥스인 영화이다. 아름다운 피아노곡과 함께 니체 바위로 유명한 스위스의 실바플라나 호숫가를 비롯하여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명 공연장의 모습을 담고 있어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설레는 순간을 선물한다. 헨리가 3년간의 공백을 깨고 복귀하는 영화의 오프닝은 뉴욕 맨해튼의 링컨 센터에서 촬영했다. 전 세계 무용·연극·오페라·발레 등 공연예술인이 꿈의 무대로 손꼽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헨리가 무대 공포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를 도와 헬렌이 ‘카르멘’의 ‘하바네라’를 연탄곡으로 합주하는 장소는 뉴욕 맨해튼 14번가에 있는 ‘스타인웨이 홀’이다. 세계적인 피아노 제조사인 스타인웨이의 쇼룸이자, 1891년 카네기 홀이 생기기 전까지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회장으로 사용되었던 역사적이고 예술적인 공간이다.
여기에 세계 7대 공연장으로 꼽히는 보스턴 심포니 홀, 런던 로열 앨버트 홀, 이탈리아 토니로 왕립극장 등 클래식 음악 애호가를 설레게 할 장소가 계속 등장한다. 거기에 헨리와 헬렌이 인터뷰를 위해 만나는 센트럴 파크, 브롱크스 동물원, 52번가의 재즈 클럽 등 뉴욕의 주요 명소를 보여주면서 아름다운 풍광과 피아노 연주의 황홀한 조화를 선보인다.
헨리가 마지막 여정으로 택한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로 이어지는 여정 또한 감각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다. 헨리와 헬렌의 로맨스가 절정에 이르는 프랑스 페리고르 마을과 헨리 혼자 삶을 정리하며 떠난 엥가딘 고원은 고즈넉하고 광활한 풍경으로 헨리의 내면을 대신해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 헨리가 머문 실스마리아 마을은 니체가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 것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영화 팬에게는 궁금하고 음악 팬에게는 반가운 얼굴도 등장한다. 영화 속 모든 피아노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세르히 살로프(1979~)가 이 영화에 헬렌의 전 연인으로 출연해 베토벤 소나타 30번을 연주한다. 이 연주곡은 베토벤이 생애 마지막 무렵에 남긴 곡이다. 연주를 듣는 동안 삶의 울렁대는 모든 순간을 표정과 눈빛으로 연기하는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 덕분에 관객은 삶의 경계에 선 헨리가 느끼는 삶의 격정과 회한을 함께 체험한다.
개인적으로 무기력한 가운데 자신을 찾아온 피아니스트 지망생 소년을 위해 헨리가 무대를 구경시켜주는 장면이 꽤 뭉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온라인으로 자신의 공연을 지켜볼 청춘을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런던 공연장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 역시 이 영화의 ‘코다’로서 든든하고 응원해봄직한 결말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과거를 닫아가는 가운데, 아이들의 미래를 열어주고 응원해주는 이 장면들 덕분에 이 영화는 예술가의 단순한 회고담에서 진정 예술가가 품어야 하는 삶의 가치로 겅중 뛰어오른다. 갑작스럽지만 당연한 그 선택이 어떤 그리움처럼 폭신하게 심정에 와 닿는다.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사진 판시네마

 

| | | OST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세르히 살로프(피아노)
2004년 몬트리올 콩쿠르 1위를 수상한 세르히 살로프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27곡을 연주했다. 아쉽게도 OST가 발매되지 않아, 영화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

| | | 트랙 리스트
1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2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 g단조 K8 3 슈만 환상곡 C장조 op.17 4 스크랴빈 에튀드 op.38 5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8번 BWV853 6 슈만 어린이 정경 10번 7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32-10번 8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 b단조 K87 9 바흐 ‘음악의 헌정’ BWV1079 10 베토벤 피아노 소타나 21번 ‘발트슈타인’ 11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5번 12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13 슈만 ‘다비드 동맹 무곡집’ 18번 14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중 ‘밤 인사’ 15 비제 ‘카르멘’ 중 ‘하바네라’ 16 리스트 ‘장송곡’ 17 홀스트 ‘행성’ op.32 중 ‘토성’ 18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23-1번 19 쇼팽 발라드 4번 20 슈베르트 소나타 B장조 D960 21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 2번 D780 22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23 스메타나 교향곡 ‘나의 조국’ 중 ‘몰다우’ 24 스크랴빈 에튀드 11번 op.8 25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 d단조 K1 26 쇼팽 발라드 2번 27 바흐 협주곡 d단조 BWV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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