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신경숙

남김없이 쓰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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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6월 1일 12:00 오전

신경숙의 글은 영도의 글쓰기를 뛰어넘어, 36.5도를 지닌 글쓰기로 유토피아를 이룩했다. 신경숙의 소설에서는 언제나 체온과 함께 음악적 울림이 전해진다. 신작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출간한 소설가 신경숙과 함께 보낸 5월의 어느 오후는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나 긴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를 부탁해’
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보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8년 전에는 그걸 시작했다가 그냥 덮어두었는데, 나 같은 사람한테는 무척 힘이 드는 일이에요. 나는 뭔가를 한번 시작하면 몰두해서 그것만 하는 경향이 있어요. 좀 고집스럽다 할까, 농촌에서 자랐으니까요. 씨앗을 뿌리고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그걸 다시 수확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고 자랐어요. 그 묵묵한 기다림이 어쩌면 내면화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 한번 뭘 하다가 멈추고 난 다음에는 다시 시작하기까지 무척 힘이 들어요. 세상 누구에게나 있는 엄마를 다뤘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거라고 짐작해요. 다수의 독자들은 책을 읽고 정말 많이 울었다고 그랬고, 누군가는 시대에 걸맞는 이야기였다고 하는데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울라고 쓴 게 아니에요. 시대에 필요한지도, 그런 걸 예측하고 쓴 게 아니에요. 나 자신을 위해 쓰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이 소설이 지구 한 바퀴를 돌고 돌아왔군요. ‘엄마를 부탁해’는 누가 뭐라 하든 한국 문학으로서 아무도 가보지 않은 지점에 간 작품이니 그 점은 평가 받아야 할 거예요. 미국은 물론 유럽에 갔을 때에도 뜨거운 반응에 놀랐어요. 국내에서도 어느덧 이백만 부가 넘어갔어요.
이 작품을 열여섯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그 첫 순간부터 쓰고 싶었어요. 1979년부터 2009년까지 삼십 년이 걸렸으니까 그만큼 오래 기다린 소설이었어요. 숱한 다른 장편들을 써내면서도 끝마칠 수 없었던 소설을 드디어 한 권의 책으로 써냈다는 것에 뿌듯했어요. 나중에 많이 읽히고 각종 상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들뜨지가 않았어요. 올해 호암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그것도 물론 기쁜 일이지만 그냥 그게 다예요. 원래 상을 받아도 그런가 보다, 해서 프랑스에서 2009년에 ‘외딴방’이 비평가와 기자들이 꼽은 ‘주목받지 못한 작품상’을 받았을 때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나름 번역이 잘 되었나 보다, 그래, 상을 받았구나라고만 생각했어요. 심사평에 프루스트를 닮았다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좋아하는 작가거든요.
(심사평 일부를 옮기자면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프루스트의 소설, 에밀 졸라의 작품 속 노동자들의 서사시를 하나로 엮는다는 것은 너무나 방대해 불가능에 가까워보인다. 그러나 신경숙은 놀라운 힘과 열정적 감수성으로, 그러면서도 무겁지 않은 필치로 이 모든 것을 녹여냈다. 이 작품은 한국 사회 전반과 노동자들의 삶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인생에 대한 폭넓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의 탄생, 노동자들의 삶, 여성의 권리 그리고 작가 자신의 성장기에 대한 놀라운 작품을 선보였다.”)
(‘엄마를 부탁해’가 2011년, 신경숙에게 한국 최초 맨아시아 문학상 수상자라는 또 다른 기록을 가져다준 것에 관하여) 원래 상이라는 게 받을 때에는 기분 좋은데 그뿐이고, 너무 오래 젖어 있어도 안 되니까. 그리고 처음 영어판이 나오기까지도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때 미국에 체류 중이기도 했고, 홍보에 들어가보니 뭔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느낌은 있긴 했는데 사실 예상은 못했죠. 내가 한국에서는 중견작가인데 미국에 가니까 그냥 무명의 신인이더라고요. 아무도 나를 모르니까 처음부터 나를 알려야 했어요. 뉴욕에는 그냥 쉬러 간 거였는데 그게 아니게 된 거예요. 잘 알려진 중견작가인 한국, 무명 신인작가인 미국 사이의 온도차를 경험하는 것도 새로웠어요. 한국에서 쌓인 경험으로 신인이지만 실수하거나 허둥대지 않고 차분하게 한 단계씩 출간과 홍보를 하는 과정을 해나갈 수 있었고, ‘엄마를 부탁해’로 경험한 것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었는데도 너무 들뜨지 않을 수도 있었고요. 미국에서도 점점 반응이 뜨거워지는데 내가 그래도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다음에 다가온 일이라 다행이더군요. 아마 더 젊었거나 경험이 부족했더라면 이리저리 휘둘리거나, 붕 뜬 것 같은 기분에서 벗어나서 다른 작품을 쓰기까지 더 어렵지 않았을까요. 뉴욕에서 보낸 일 년간 서울을 거의 완벽하게 잊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어요. 맨해튼의 아파트에서 센트럴 파크도 가깝고, 모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오페라 등 모든 곳들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뉴욕을 한껏 걸으면서 즐겼어요. 걷는 걸 워낙 좋아해서 무작정 걷고 산책하고 그림이며 전시, 오페라도 많이 보고,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어요. 뉴욕이라는 도시가 가진 활기랄까, 매력이 조만간 또 그리워질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의 뜨거운 반응에 관하여) 프랑스어와 내 문체가 잘 맞는 걸까요? 들었을 때 확실히 발음이 좀더 음악적인 언어라고 해야 하나, 운율감이 더 있어요. 미국에서 낭독회를 했을 때가 기억나요. 프랑스 작가와 함께 신인작가로 소개되는 자리였어요. 프랑스어와 영어로 된 같은 텍스트를 동시에 들을 기회였지요. 영어랑은 참 다르게 들리더군요. 처음 프랑스어판이 나왔을 때에도 어차피 나는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된 책이니까 왠지 낯설고 새롭고 신기하기도 하고, 이게 내 책인가도 싶다가 책을 가만히 품에 안아보기도 하고 책장을 넘기며 냄새도 맡아보고… 그렇죠. 문체가 시적이다, 음악적이다라는 이야기는 번역본으로도 전해지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산울림 소극장에서 열린 신작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낭독회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글을 고칠 때, 소리 내서 읽는 걸 기본으로 해요. 소리 내서 읽어보고 뭔가 걸리면 문장을 고치고 다듬어요. 그래서 그런가, 내 소설은 낭독을 하면 더 특별하게 들린다고 하더라고요.
(미국 NPR 라디오 방송의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한 패널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엄마를 부탁해’를 두고 “김치 냄새 나는 소프 오페라”라고 했다가 이후 사과 방송을 했던 일도 있었는데) 원래 방송에서는 일부러 자극적인 말을 하니까, 그것 역시 나올 수 있는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김치 냄새가 나는 소프 오페라, 클리넥스 소설이라고 폄하했지만, 나중에 사과를 받았어요. 공식적으로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 적절치 않은 수식어였고, 소프 오페라까지는 그렇게 읽힐 수도 있다고 쳐도 아니, ‘김치가 뭐 어때서?’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노르웨이어 번역자가 한국인 입양아 출신이었어요. 아주 어릴 적에 입양되어서 아예 한국어를 모르고 크다가 나중에 성인이 되어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에도 몇 번 왔고, 그런데 아직도 생모 – 한국인 엄마 – 를 찾지 못했던 사람이었지.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이 혹시 마음 불편해 하지 않을까를 고민했고, ‘엄마를 부탁해’ 노르웨이어 번역판 출판 행사에서 내 통역을 맡았는데, 나는 그쪽 기자들 앞에서 일부러 조심조심 대답을 골라서 하고 그랬어요. 어느 순간 이 사람도 내가 그 사람의 어떤 상처 난 부분을 건드릴까 봐 조심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더군요. 먼저 나한테 자기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괜찮다고 말해줬어요. 아주 어릴 때 입양되어 길러준 노르웨이의 엄마가 있고 그 사람을 엄마로 생각한다면서요. 번역이 되었는데도 독자들은 책을 읽고 많이 울었다고 이야기하다가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그랬는데 엄마에 대한 이야기였으므로 그렇게 모두가 다 반응한 걸까요?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으니까요. ‘엄마를 부탁해’보다 사실 놀라운 건 ‘풍금이 있던 자리’였죠. 그건 소설집이었고 어떤 열풍과도 같은 반응이 일어나서 내 생활 자체를 바꾸게 했으니까요.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이네요.

‘풍금이 있던 자리’

나의 이십 대는 길었어요. 나는 생활인이었으니까 우선 일을 너무 많이 했고, 스물아홉까지 조금도 쉬어보지 않았거든요. 우리의 이십 대는 너무 암담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 단어가 적절한가? 우리 윗세대, 더 옛날 세대들은 또 자기들의 시대가 가장 어두웠다고 말할 거예요. 6.25를 경험한 세대나 4.19 세대는 자신들의 세대가 가장 암울했다고 하겠죠. 자기 발등 아래 떨어진 불이 가장 뜨거우니까.
1980년대, 1963년생인 내가 이십 대이던 그때에는 사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힘들었어요. 그 안에서 어쨌든 매일을 살아갔지만요. 우리 학교(서울예술대학)가 명동 한복판에 있었고, 그 옆에 명동성당이 있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시위대가 교정에 있었고, 늘 최루탄 냄새 속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나올 때까지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 어울리는 순간에도 최루가스 냄새가 배어 있었어요. 지금 이십 대들은 상상도 못하는 그런 시절이었지. 1980년대에 이십 대를 지난 우리는 언제나 그 최루가스 냄새를 계속 맡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강의실 밖으로 나가면 계속 시위대들이 뭔가 변화시키기 위해,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고요. 그 속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는 우리가 무력하게 느껴졌어요. 시와 소설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뭔가를 할 수 있는가, 예술의 아름다움을 꿈꾸고 동경하는 것이 이 암담한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심지어 우리는 아직 예술가도 아닌, 그냥 예술가를 꿈꾸는 학생이었으니까 더욱 회의가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나누고, 친구들을 만나고, 꿈을 꾸고, 그런 일들을 해나갔네요. 우리 때만 해도 무엇이든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내 소설 속의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아마 그때 비롯되지 않았나 싶어요. 나는 덜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저에는 우울이 깔려 있는 거죠. 억압과 암담함 속에서 십여 년 이상을 보냈으니까, 어떻게 떨쳐낼 수 없이 각인되어 있는 거예요. 지금 젊은 친구들은 해맑고 자유롭고, 가볍고 마음이 빚진 것이 없고, 그래서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자유롭게 거침없이 써나갈 수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우리는 뭔가에 늘 부딪히고, 짓눌리거나 중간에 가로막히고 그랬죠. 나아가 이게 쓸모 있는 것인가?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가? 그런 회의를 하는 것이 거의 습관적으로 늘 따라다녔어요. 이게 맞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그렇다고 또 누구의 책임도 아니죠. 이십 대가 아주 길게, 피로할 만큼 길게 느껴졌어요. 등단을 이십 대 초반에 해서 그런 걸까. 등단했다고 한들, 글을 쓸 지면이 많은 것도 아니고 요즘처럼 매체가 다양한 것도 아니라 간간히 단편들을 발표하다 스물여덟에 첫 소설집 ‘겨울 우화’를 묶어냈고요. 그때까지 계속 무슨 일인가를 했어요.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어요. 내가 일하고 나를 책임지고 하는 걸 열여섯 이후부터 늘 해야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생활이 보장되지 않으니까요. 잡지사 기자도 했고, 클래식 FM의 방송 대본을 쓰는 구성작가로도 3년 남짓 꽤 오래 일을 했어요. 그때 어지간한 음악들은 다 들은 것 같아요. 브렌델·푸르트벵글러·로스트로포비치를 듣게 되었죠. 음악회에 갈 기회도 많았 고요. 지금은 좀 덜하지만 당시에는 음악회에 가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었어요. 요즘처럼 각종 공연이 많은 시절도 아니었고, 음악회 간다고 하면 다들 굉장히 호사스러운 거라고 생각했어요.
글을 쓰면서는 딱히 바라는 게 없었는데, 아 언젠가 넓은 책상이 있는 그런 방에서 글을 쓰고 싶었어요. 누가 나한테 뭘 갖고 싶으냐 그러면 넓은 책상, 늘 이렇게 대답했어요.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에도 나오죠. 그 널따란 책상 위에서 밥도 먹고, 한쪽에서는 글도 쓰고, 올라가서 가끔 거기에서 낮잠도 자고, 그런 생각을 계속 했던 이십 대였어요. 처음에 바라는 것이 오로지 나만 쓸 수 있는 책상이었는데 한번 내가 쓸 수 있는 책상이 생기니까, 그러니까 넓은 책상으로 꿈이 커졌고요. 책상이 좁아서 다른 걸 하려면 저쪽에다가 치워놓아야 되고 그런 거 말고 그냥 책 읽다가, 옆에서 스케치도 할 수 있고, 다른 것도 보고, 과일이나 군것질을 먹다가 안 치우고 놔둬도 되고…. 그냥 책상이 아니라 작업대로서의 넓은 책상을 갖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이룬 거 없이 서른이 된다는 것에 허무가 느껴졌어요. 이룬 것도 없이, 성공을 못했기 때문에 그랬다기보다도, 이렇게 서른이 되는구나.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보잘것없이…. 그런 허무가 깊이 밀려와서 무작정 라디오 방송국에 사표를 냈어요. 언젠가는 그때 밀려왔던 허무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어요. 한국 사회가 서른에 주는 압박감이 대단해요. 지금은 좀 덜한데 그때는 좀더 심했어요. 1963년생에게 서른 살이라는 건… 특히 결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어요. 결혼했니 안 했니? 이게 꼬리표처럼 딱 달라붙어서 정체성을 구분 짓고요. 나는 서른의 여자인데 그때까지 결혼도 안 했고, 일찍 등단을 했지만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내 자리를 잡았던 것도 아니라 더욱 그런 질문들이 주는 피로함의 무게와 맞닥뜨렸던 것 같아요. 클래식 음악 방송 일을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그냥 갑자기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했어요. 서른이 그렇게 크게 다가왔으니까요. 내가 생각하기에 이제 일 년만 더 지나면 서른인데 어쩌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글쓰는 일을 어떻게 한 번도 열심히, 깊이 온전히 몰두해보는 시간을 한 번도 갖지 못한 채, 서른이 될까 싶었던 거예요. 이대로 서른을 보내면 너무 슬플 거 같고, 내 인생 전체가 무너지거나 흔들릴 것 같았어요. 일 년 동안 사직터널 옆에, 적십자 병원 옆 행신동 독신자 아파트에 여동생과 함께 둘이서 살던 때인데, 내 여동생이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가 막 되었고 어쨌든 돈은 동생이 벌어올 테니까…. 그걸 믿고 관뒀어요. 여동생한테 일 년 동안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전업작가처럼 무조건 글을 쓰겠다고 하니까 또 동생이 지지를 해줬어요. 그 때 썼던 작품들이 모두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에 들어 있어요.
(‘풍금이 있던 자리’의 인기로 1993년 세 번이나 9시 뉴스에 나왔는데) 시대가 바뀐 걸지도요. 나는 ‘풍금이 있던 자리’ 속 6편의 작품들을 스물아홉에 다 썼고, 해가 바뀌어서 서른에 책을 냈어요. 3월이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회갑이었어요. 회갑 잔치에는 모든 자손들이 가서 축하드린다고 절을 하잖아요. 나는 아버지한테 내 책을 가져가 내 자식이라고 내놓았어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굉장히 단명을 했어요. 한 번도 회갑을 넘긴 분이 없었다는데, 회갑을 지낸 건 아버지가 처음이었다고 해요. 거기에다 우리집은 종가이고 아버지가 문중의 장손이거든요.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이에요. 아버지 회갑에 시골에서 아주 큰, 정말 벌일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마을 잔치를 했어요. 동네 사람들 다 오고. 엄마가 그러는데 조기를 800마리인가 먹었다고 해요. 그건 먹는 게 문제가 아니지. 800마리 조기를 준비한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엄청난지. 궤짝으로 여덟 짝이었다니까. 어쩌면 800마리가 더 되었을지도 몰라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치음식이 다 있었어요. 우리가 종가였어요. 그래서 그 넓은 마당에, 가득 가득, 아침부터 밤까지 손님들이 왔어요. 그걸 지켜보다 지쳐서 나는 그냥 잤어. 돼지도 잡고 소도 잡는 제대로 된, 완전 옛날식 잔치였고, 서울에서 손님도 많이 왔어요. 다들 우리집 그 너른 마당에 와서 밥 먹고 아버지를 중심으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정말 잘 놀았어요.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돼요. ‘놀았다’고. 그걸 보다가 지쳐서 잤어요.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하면 힘이 딸려서 아무도 못 할 거야. 잔치가 다음 날, 다다음 날까지도 계속되었어요. 그때는 다 필름 카메라여서, 지금과 같은 디지털 카메라 시대였으면 동영상도 다 찍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다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잔치였는 걸요. 그렇게 나는 이틀 있다가 서울에 왔어요. 이제 책이 나왔고, 일자리를 구해야 하니까요. 그때까지 나는 소설을 써서 내 생존을 해결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상상도 못했는걸요. 소설이란 내가 귀하게 여기는, 내가 늘 마음속에 꿈이라고 품고 사는 그런 일이지, 이걸로 밥을 먹고 뭘 사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곧장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면서 이력서도 내고 그러는 와중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일주일쯤 지났는데 책을 벌써 재판을 찍는다는 거예요. 기대 밖의 일이라 순간 “응?” 이랬는데. 너무 어리둥절해서요.
또 일주일 있다가 재판을 또 찍는다고 하고 점점 찍는 부수가 늘어나는 거예요. 이천 부, 삼천 부 찍는데 더구나 창작집이니까 두 번 정도 찍으면 그게 최대치인데 계속 더 찍는 거예요. 아마 지금도 그 기록은 안 깨졌을 거예요. 장편 아닌 단편소설집으로 ‘풍금이 있던 자리’가 최다 판매 부수 기록을 가지고 있을 걸요. 그 덕분에 갑자기 나는 더 이상 일을 찾지 않아도 되었고, 드디어 고등학교 때부터 서른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생계를 위해 일을 했는데, 그걸 안 하고 글만 쓸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일 년은 글 쓰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고요. 정말 아무 대책도 없어 하던 일을 그만두고, 독신자 아파트에 틀어박혀서, 환경이 아주 좋지는 않았는데도요. 거기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위에 침대가 있고 나는 그 아래에서 글을 썼죠. 바로 위에서 자고 있는 동생의 숨소리가 무척 거슬려서 내 동생을 상처 줬던 일도 많아요. 글 쓸 때에는 고도로 집중력이 올라가서 그런가, 갑자기 동생의 숨소리가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내 동생한테 내가 굉장히 좀 못되게 굴었어요. 당시 밖에 나가서 돈도 벌어오고 먹여 살려주는 동생한테, 집에 오면 따뜻하게 맞아주기는커녕, 사나운 말을 하면서 까칠하고 예민하게 굴었어요.
아무도 ‘풍금이 있던 자리’의 성공을 짐작하지 못했어요. 그때 ‘풍금이 있던 자리’를, 계간지 ‘문학과 사회’에 발표를 했어요. 소설집으로 나오기 전이었는데 ‘TV 문학관’ 프로듀서가 그걸 읽고 연락을 했어요. 책으로 나오기 전 이미 ‘풍금이 있던 자리’를 TV 문학관으로 내보냈어요. 그 감독이 얼른 내용만 보고는 뭐가 만들어질 것 같았나 봐요. 막상 해보니까 너무 어려웠는지 자꾸 연락을 해왔어요. 글로는 얼른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심리 묘사랑 내면의 이야기가 너무 많으니까 영상으로 담아내기가 힘들었나 봐요. 그래서 감독이 매일매일 나한테 전화를 하고, 전화할 때마다 “이 장면은 어떻게 하지?” 이러더군요. 어찌나 질문을 많이 하는지, 내가 나중에는 알아서 마음대로 하시라고 하고 말았어요. 소설을 쓰는 것까지가 내 일이지, 딱 거기까지예요. 소설을 영상으로 만드는 건 내 일이 아니잖아요. 나는 소설가일 뿐이니 영상을 만드는 걸 내가 어떻게 하느냐, 본인이 본인의 문법으로,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드시라고 했어요. 그러고 방송이 된다 그래서 봤더니, 거의 낭독 수준으로 만든 거예요. 내레이션을 깔고 화자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 만들었더군요. 그게 먼저 나갔는데 그 영향이 있었을까? 지금 돌이켜봐도 좀 터무니없을 정도로 ‘풍금이 있던 자리’는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단편소설이 일반 독자들한테 많이 읽힐 수 있었던 거, 흔치 않은 일이잖아요. 시대가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바뀌면서 새로운 감수성을 원하고, 기존에 있던 것에 대한 권태와 식상함에 사람들은 새로운 걸 원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내 작품이, 내면으로 파고드는 듯한 문체가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을까도 싶어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랬을까?
‘풍금이 있던 자리’ 덕분에 나는 혼자 살 수 있는, 단독으로 살 수 있는 작업실을 가지게 되었고, 넓은 책상을 가지게 되었어요. 집을 구하자마자 넓디넓은 책상을 하나 짜달라고 해서 완성된 다음에는 거기 가서 턱 누워도 봤어요. 그때부터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소설만 썼지. 삼십 대를 돌이켜보면 소설 쓴 기억밖에 없어요.
일찍부터 생활을 위해 다른 일을 했던 건 나한테 좋은 일이었어요. 내 문체가 서정성까지 포함해서 좀 환상적이고 꿈꾸는 듯하고, 다른 세계를 향하고 그렇다면, 거기 있는 내용들은 현실적인 이야기들인데 그건 내가 일찍부터 일을 했기 때문에 얻어진 감각이었지요. 만약 조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썼더라도 나쁘지 않았으려나? 만약 내가 사람들 속에 나가서, 생활을 위한 일을 해보지 않은 채 서른이 되었고, 글을 계속 쓰게 되었다면 그런 감각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서른이 되도록, 일찍부터 벅차게, 내가 생각해도 정말 벅차게 일을 했던 것이, 많은 감정들을 알게 해주었고 사람들을 만나게 해줬고, 그게 나한테는 어떤 힘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농촌에서 자라면서 씨 뿌리고, 씨앗에서 새싹이 나고, 싹에서 열매가 맺어지고, 열매가 맺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와중에 얼마나 많은 자연환경들이 폭력적으로 개입하는지 다 보면서 자랐어요. 태풍이 와서 갑자기 모두 다 쓸어가 버리거나, 가뭄 속에서 모두가 다 말라 죽거나 그럼에도 그 속에서 살아남는 것을 거두는 걸, 아주 어릴 적부터 가까이에서 본 거죠. 그걸 책에서 보거나 이야기로 듣거나 한 게 아니라 실존적으로 내가 보고 자랐으니까. 그런 감각들이 몸에 배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 내 문체가 제 갈 길로 아주 멀리 갔다면 굉장히 허황된 세계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랬더라도 나름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현실적인 내용으로 인간의 삶과 함께 조우할 수 있는 지점에 닿는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내가 일찍부터 일을 한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그 널따란 책상에서 글만 쓸 수 있으니 그게 얼마나 행복해요. 나는 그게 너무나 감사했어요. 삼십 대에는 쉬지 않고 그 책상에서 글을 쓰면서 그렇게 해서 삼십 대가 되었고, 삼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는 ‘외딴방’ ‘깊은 슬픔’ ‘바이올렛’ ‘감자 먹는 사람들’ ‘아름다운 그늘’… 삼십 대에는 정말 열심히 썼어요. 글을 썼다, 외에는 남아있는 게 없어요. 나는 언제나 글을 쓰고 있었어요. 어디 갔다 와도 돌아와서 늘 글을 썼을 정도로요. 그렇게 글을 쓰면서 마흔이 되었는데 어깨가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 어깨가 밑으로 내려오면서 닳아지는 것 같아요. 어깨 때문에 요가원에 갔어요. 처음엔 너무 안 맞는 장소에 온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까 너무 좋아서 그냥 계속 했어요. 아까 말한 시골스러운 근성 같은 거지. 뭘 바라고 시작한 게 아니라, 하루에 한 시간은 내 몸을 들여다보고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니까 좋더군요. 내가 발가락이 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만큼 어딘가가 꽉 막혀 있었다는 거겠죠? 요가를 시작하고 3개월이 지나니까 어깨가 안 아픈 거예요. 팔도 잘 못 들겠다 싶었던 통증이 다 사라졌어요. 지금까지 요가를 하면서 남들이 겪은 오십견이나 난 이런 것 없이 지나왔어요. 조금 후회되는 건 요가를 시작하면서 산에 가는 걸 그만둔 거예요. 나는 뭐에 몰두하면 그것만 계속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산 옆에서 살았으니까 늘 산에 갔는데, 아침에 산에 갔는데, 작품에 산 근처 조깅하는 거, 산에 가는 이야기도 많이 나와요. ‘우물을 들여다보다’ 이런 작품들도 그렇고…. 요즘 조금 후회가 들어요. 산에 가는 걸 왜 관뒀을까. 가끔, 다시 시작을 해보려고 아침에 산에 가요. 또 집에서 가까우니까요. 너무 좋더라고요. 산 속에 황홀한 풍경이 있어요. ‘풍금이 있던 자리’ 속 문장들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병행해볼까도 생각 중이에요.
요가를 하면서 십 년을 보냈고, 오십이 되었고, 건강에 크게 신경 안 쓰고 ‘엄마를 부탁해’도 쓸 수 있었고, ‘리진’도 쓸 수 있었고, 무사히 잘 건너왔어요. 지금 딱 오십 살이 딱 된 거예요. 올해에. 삼십 대에서 사십 대로 갈 때, ‘깊은 슬픔’ ‘외딴방’ ‘바이올렛’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썼듯이, 사십 대에서 오십 대로 올 때,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썼으니까 앞으로 건강하게 또 써야죠. 오십 대에도 최소한 세 편 이상의 장편들을 써내고 싶어요.
누군가는 종이 책이 곧 사라질 거라고도 하는데 나는 아직 종이 책이 좋아요. 내 손안에 만져지고, 갖고 다닐 수도 있고, 양감을 가진 형태로 존재하는 거죠. 책을 읽는다는 건 예를 들면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보는 것과는 다른 행위예요. 한 문장 한 문장을 따라가야 하고, 중간부터 소설을 읽을 수는 없잖아요. 첫 장부터 온 마음과 영혼을 담아 책 속의 세계로 오롯이 들어가야 해요. 만약 같은 이야기더라도 책으로 읽는 이야기는 각색된 영화와는 달리, 온전히 그 사람만의 것으로 뇌 속에 각인될 거예요. 아무리 뛰어난 영화감독이 대단한 영상미를 지닌 영상을 만들어도 그것은 ‘나의 것’은 아니잖아요. 문장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거기에 마음과 영혼의 일부를 싣고 들어오고, 그건 그 사람만의 유일무이한 경험이 되고요. 설령 전자책의 시대가 되더라도 그건 바뀌지 않을 거예요. 다만 지금처럼 종이 냄새를 맡고, 종이를 손끝에 느끼고 하는 식의 감정은 가질 수 없겠지만요. 우리 세대는 매체와 글쓰기 수단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껴왔어요. 지금 젊은 친구들은 노트북이나 아이패드에 바로 쓰고 블로그나 인터넷에도 익숙하죠. 반면, 내 몸 안에는 원고지, 대학노트, 타자기가 있어요. 나 스무 살 때에는 어디에 글을 보내려면 우선 대학노트에 쓴 다음, 타자기로 쳐서 내야 했어요. 그 다음에는 워드 프로세서가 있었고, 지금은 노트북이며 스마트폰·태블릿이 있는데 나는 모든 그런 걸 다 통과해온 거예요. 내 몸에는 펜촉부터 타자기 버튼의 감촉, 최근의 태블릿까지 모든 도구의 기억이 다 남아있어요. 사실 나는 기계치라 도구나 현대문명의 이기에 무엇이든 대단히 깊숙이 적응해본 건 없어요. 지금도 물론 작업은 노트북으로 하지만 인터넷도 메일과 검색 외에는 다른 건 잘 못해요. 왜 그렇게 글을 쓰는 수단이 변하는지 그 깊은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도구 사용에 대해서는 딱 필요한 만큼만 익혀서 글 쓰는 것만 해요. 나한테 정말 필요한 건 딱 그거니까. 생활 역시 글 쓰는 데에만 맞춰져 있고 저녁 약속이나 모임에도 거의 나가지 않아요. 보통 새벽 3시면 일어나서 움직이고, 보통 집필을 그때 가장 많이 해요. 그리고 아침을 가볍게 차려 먹고 요가원에 가서 한 시간 요가를 한 다음에는 집에 돌아와서 살짝 낮잠을 자고 다시 글을 쓰는 생활이에요. 중간중간 음악을 듣기도 하고, 악기를 배우러 가기도 하지만 생활은 단순하게 글 쓰는 걸 최우선으로 하고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어찌 보면 수도승 같기도 한데 그렇지 않으면 글을 원하는 만큼 써낼 수가 없어요. 글쓰기에 얼마나 집중이 필요한지, 사람들은 흔히 잊기 쉬운데 원하는 만큼 모임에 나가거나 사람들을 만나면서 집필을 할 수는 없어요. 초청 강연이나 각종 낭독회·사인회 이런 행사를 하는 건 책이 나왔을 때에만 하는 거고, 나는 말을 오래 하면 목이 금방 아프고 목소리도 변하고 해서 강연도 아주 가끔만 해요. 보통은 늘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이제는 혼자 여행을 하지 않지만 여행을 떠난 곳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도 많아요. 더 이상 혼자 여행을 안 가는 이유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에요. 제주도에 있을 때 그 호텔에서 내가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매일 아침에 일종의 쇼를 해야 했어요. 일부러 로비에 내려가서 아침에 신문도 좀 보고, 커피도 내키지 않아도 무조건 한 잔씩 마시고 그러면서 내가 잘 있다는 걸 알려야 호텔 측에서도 안심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어요. 서른 넘은 여자가 혼자 제주도에 와서 장기 투숙을 하는 건 이상하게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그때 알았고, 이제는 더 이상 혼자 여행은 잘 안 다녀요.
바다가 보이는 여행 장소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동해안도 그렇고 제주도도 그렇고, 낙산사도 그랬어요. 이제는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도 자주 오가고 특히 중국처럼 옆 나라는 자주 가는 편이에요. 그런데 갈 때마다 엄마한테는 여행 간다는 걸 말하지 않아요. 지금도 늘 걱정하시니까요. 비행기 떨어진다고(웃음).
삶의 곳곳에서 마주친 장면들이 글을 쓰다 보면 다시 나오고, 그것이 짧은 이야기에도 반영이 되는 건 사실이에요. 원래 소설이 어느 정도 한 번 시작되고 나면 알아서 흘러가요. 소설 자체가 그 나름의 운명을 제각각 지니고 있어요. 내가 작가이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모두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어요. 이야기들이 개별적인 주체처럼 존재하고, 나는 기승전결을 뚜렷하게 정해두고 글을 시작하는 게 아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는 이야기와 내가 같이 소설을 이끌어 가거든요. 나는 종교가 없어요. 무신론자이고 신을 믿지 않아요. 나는 작가이고 그렇기에 내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내가 지어나가는 그 세계, 소설 속 세계일 뿐이니까요. 그 세계를 완벽히 하고 그것만을 믿는 것, 그게 내가 작가이기 때문에 끝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내가 우리 엄마 부탁은 다 들어주는데, 딱 한 가지 못 들어 주는 게 있어요. 온 집안이 가톨릭인데 나 혼자 여전히 무교예요. 신이 존재하는 세계와 소설의 세계가 너무 달라요. 신의 세계는 완벽하고 순수하고 흠이 없어요. 소설 속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이기 때문에 남루하고 누추해요. 그런 누추하고 남루한 세계에서 신념을 가진 주인공들이 등장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그런 거죠. 음악은 완전무결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의 세계를 동경하고 완벽으로 향하고자 하는 예술이지만, 소설은 흠과 오류가 용인되는 세계예요. 사랑에서 흔히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라고 하잖아요. 소설은 패자의 편을 들어주고 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줘요. 굳이 승패를 따진다면 그렇죠. 절대자에게 모든 걸 내맡기고 스스로를 놓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부딪히고 깨지고 패배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승리한 사람, 역사에 이미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역사 너머에서 소소하게 일상을,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고, 그런 마음이 ‘리진’이나 ‘엄마를 부탁해’에도 드러난 셈이에요. 리진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우리는 엄마의 행방을 모르는 채 이야기가 끝이 나요. 내가 의도를 가지고 그랬다기보다도, 쓰다 보니 그렇게 흘러갔어요. ‘사랑’을 다루고 싶었는데 처음 시작과는 다르게 어느새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소설마다 각자의 운명이 있고 이야기는 자발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내가 작가이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소설이 내가 던지고자 했던 곳보다 더 멀리까지 나아가는 경우도 있어요. 소설 자체의 자발적인 동력으로요. 아니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일찍 정리하고 멈춰야 하는 이야기들도 있고요. 쓰기 전에는 그러니까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는 절대 알 수가 없어요.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를. ‘엄마를 부탁해’를 쓸 때에는 이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고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올 줄 몰랐던 것처럼, 앞으로 쓰여질 소설들도 제각각 운명을 지니고 있을 거예요. 미리 짐작하지는 않으려고요. 다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누가 내 소설을 읽으면서, 문장 하나하나를 따라 내가 지어낸 세계 속에 들어와서 위로 받고 돌아간다면 그건 참 듣기 좋은 이야기예요. 부러 그렇게 쓰는 건 아니지만, 내가 세상을 보는 기저에 애정과 따뜻한 마음이 있고 소설 안에 그것이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남루하고 누추한 것일지라도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지 호기심을 가지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 그게 소설의 시선이 아닐까요. 세상에 정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은 뉴스들이 흘러나오잖아요. 정말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인간이라는 게 끔찍하고 견딜 수 없게 느껴지는 그런 이야기들이 엄연히 들려와요. 현실이 드라마 속보다 더 끔찍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내 소설 속의 현실은 따뜻하고 애정이 묻어났으면 해요. 엄마를 잃어버렸지만 영원히 상실한 것이 아닌 것처럼요. 다른 누군가는 냉소적인 어조로 차가운 현실을 사실적으로 반영해내는 소설을 쓰기도 하겠지만 그건 내 몫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달’은 사실 ‘당신’ 혹은 ‘너’ 혹은 ‘그리운 누군가’로 치환될 수 있을 거예요. 읽는 사람에 따라서.

남김없이

다음 생에 태어나면 몸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온종일 충실하게 몸을 쓰면서 삶을 사는 사람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농사짓는 농부, 작업실에서 나무를 만지는 목수, 아니면 땀을 흘리며 혼신을 다해 집중해 춤을 추는 사람도 좋은 것 같아. 소설은요, 이번 생에서 다 쓰고 갈 거예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쓸 수 있는 한 모두, 다 남김없이 쓰고 갈 거예요. 아쉬움이 안 남도록요.

인터뷰 김나희(파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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