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 폴

흥얼흥얼 끄적끄적, 노래의 본능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2월 1일 12:00 오전

동서고금 막론하고 우리 곁에 머물렀던 류트 혹은 기타와 부르는 시가(詩歌).
그 사뿐한 궤적에 ‘루시드 폴’ 이름 넉 자 올리는 데 주저함은 없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울고 있는
내 친구여/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평범한 사람
– 평범한 사람 –

어젯밤에 꿈을 꾸었지/모두 기억날 것 같진 않지만/가족들이 나오는 꿈은 늘 불안하지/
온통 걱정스런 눈빛만 가득하니까… 좁은 계단과/비탈진 지붕 아래/다락방 하나에 모여/우리 살고 있던 것 같아/우리 떨어지면 안 돼/우리 떨어지면 안 돼/
난 울면서도/온통 그 생각뿐이었던 것 같아
– 가족 –

고음악계의 순박한 디바, 에마 커크비가 부르는 류트 송을 듣고 있자면 비록 그 가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가슴 한쪽이 아릿해짐을 느낀다. 화려한 ‘부수(附隨)’가 말끔히 제거된, 사람 한 명과 류트 한 대가 전하는 노래의 힘. 들판의 생물로 치자면 한 떨기 풀잎 같은 류트 송의 전달력이 왜이리 강한가. 커크비가 말하길 “류트는 끊임없이 침묵으로 귀착한다.”
퍼셀·다울런드 같은 류트 송의 대가들은 고리타분한 음악사 책에서조차 ‘옛사람’이 된 지 오래다. 소위 현대 ‘클래식 음악계’가 낳은 새로운 류트 송을 만나보긴 어렵다. 정말, 이제 더는 없는가. 손가락으로 현을 뜯어 나무통을 울리고, “끊임없이 침묵으로 귀착하는” 그 소리에 노래를 실어내는 일. ‘리듬’이라는 원시를 지나 악기와 인성(人聲)이 가장 소박하게 마주하는 일. 다행히 오늘날에도 그 노래들은 이어진다. 범주는 대중음악으로 옮겨졌고, 현대의 음유시인은 류트나 테오르보 대신 기타를 잡았다.
누군가 말했다. “클래식 음악이 대중과 멀어진 이유는, 대중이 가사 없는 연주음악의 아름다움을 인지하지 못해서”라고. ‘대중’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모든 걸 쉽게 떠넘길 수 있으니 어느 입장에선 속 편한 논리일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아쉬움만 커진다. ‘순수한’ 음악계는 왜 가사의 힘, 이야기의 힘을 망각해왔는가.
다울런드에서 조빔을 거쳐 스팅과 장필순까지, 동서고금 막론하고 우리 곁에 머물렀던 류트 혹은 기타와 부르는 시가(詩歌). 그 사뿐한 궤적에 ‘루시드 폴’ 이름 넉 자를 새롭게 올리는 데 주저함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가을, 6집 ‘꽃은 말이 없다’와 함께 루시드 폴이 조용히 ‘객석’으로 걸어들어왔다.

클래식 음악은 이 땅에서 늘 마이너리티였다. 가장 화려하고도 치열한 마이너리티. 나라의 큰 행사마다 클래식 음악 한 곡쯤 필수로 등장하지만, 이는 대중의 애정도와는 무관한 선택인 듯하다. 당신도 한때 대중음악의 마이너리티 영역에 있었으나, 지금은 이렇게 신보를 내면 인터뷰가 수십 개씩 이어지는 자리에 앉게 됐다. 소속사인 안테나 뮤직의 대표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안테나 뮤직의 성공 비결로 소속 작가들이 하고 싶은 걸 즐겁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점을 꼽았다. 동의하는가?
나는 좀 물음표가 많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고, 크게 봤을 때 음악인인 나도 좋아하는 몇 장의 음반만 들을 뿐이지 클래식 음악을 즐기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대중음악이 됐든 현대음악이 됐든 클래식 음악이 됐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잠시 짐을 내려두고 평안한 마음으로 작품을 즐길 수 있는 사회인가 싶다. 난 아닌 것 같다. 안테나 뮤직의 아티스트들이 지금까지 잘해왔지만, 과연 음악만이었을까. 유희열·정재형 형의 이슈메이커로서의 스타성… 나도 사실 예외는 아닌 게 유학을 했고, 학위를 가졌고, 그게 다 이슈가 됐다. 사람들이 내 음악에 정말 100퍼센트 공감하고 교감해서 그 음악을 소비하고 공연에 와줬을까. 아닌 것 같다.

무척 회의적이라 놀랐다.
굉장히. 세상이 더 평안해지고 미친 듯이 몰아세우는 이 속도가 줄지 않는다면, 예술 하는 사람과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도시에 살고 있는 경우라면. 그렇지 않나? 자살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고, 아무도 아이를 가지려 하지 않고, 강남에 가면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광고판에 나오고, 성형외과가 미친 듯 줄을 서 있고….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사람답게,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아까 얘기한 딜레마는 계속될 것이다. 자살률이 제일 높다는 건 제일 살기 싫다는 뜻이고, 출산율이 낮다는 건 우리 애들에게 이러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살기 힘든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도시의 모습도 그렇다. 강남에 가면 무거운 돌로 지은 건물을 보기 어렵다. 마치 부수기 위해 지은 것처럼.
멀리서 보면 없는 거다. 생겼다가 사라질 건물.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난 정말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사랑하는데 대한민국은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

루시드 폴의 음악을 듣고 치유(시쳇말로 ‘힐링’) 받았다는 청자들의 리뷰, 혹은 치유 기능이 있다는 기사들도 보인다. 앞서 우리 사회에서 느끼는 이런저런 회의에 대해 얘기했는데, 곡 쓸 때 이 사회를 치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나?
아니. 갈수록 단어 쓰는 게 신중해지는데, 치유는 ‘목적’이 아니다. 결과일 뿐이다. 의사라면 치유가 목적이 될 수 있겠지만, 의사가 아닌 사람은 치유가 목적이 될 수 없고 되지도 않을 것이다. 공원에 갔을 때 경이롭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이파리가 떨어지는데 그순간 유치원생이 똑같은 이파리를 들고 온다든가, 꿩이 있다든가, 새들의 노래가 서라운드로 들린다든가. 그들이 나를 치유하려고 그런 건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치유감을 느낀다. (내 노래에 대한 평도) 그런 것 같다.

얘기를 나눌수록, 빠르고 호된 세상에서 자신의 성정을 어떻게 지키는지 의문이다. 오늘의 스케줄만 해도 얼마나 빠듯한가.
나를 지키는 것, 그건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달렸다. 어떻게 살아야 편하고 행복한가, 동경하는 삶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을 닮고 싶은가…. 체질적으로 그 지향점을 끝까지 바라보다 죽을 듯하다. 어느 시점에 탁 하고 놓아버리지 않고. 항상 동경했던 건 선함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인데, 그렇게 살고 싶다.

‘선함’은 ‘옳다’ ‘정의롭다’와는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곤 하는데, 불자들 사이에선 ‘여여(如如)하다’라고 말한다. 제자리에서 순리대로 조화롭게 살아간다는 의미다.

그래서 동식물을 좋아하는가? 순리대로 조화롭게 살다 죽는.
지금 세상에서 동식물은 굉장한 약자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인간이 악하게 굴며 조화로움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며 여여하지 못하게 살아서. 그러니 약자인 동식물은 연민의 대상이 된다. 자세히 보면 가장 여여하게 사는 존재들. 그래서 성찰하고 반성하게 된다.

루시드 폴의 노래들을 듣다가 왠지 모르게 ‘물고기’란 단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자세한 이야기는 본지 162쪽). 노래를 듣다가 단어 에 깊게 빠져드는 건, 가사 쓴 사람이 그만큼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듯한데.
나는 ‘객석’에 나오는 음악가들처럼 음악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음악과 문학과 언어의 아주 작은 교집합을 만드는 사람이다. 음악은,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수단이다. 물 속에서 아무리 사람을 때려도,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반면 언어는 직접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다. 나는 문학에 감동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문학소년인 적도 없었다. 글귀를 보고 아름답다 느낀 적이 없다. 아직까지도 글과 말에 대한 회의가 많다. 속이기도, 근사해보이기도, 포장하기도, 상처주기도 쉬우니까. 음악에 비하면 매우 그렇다.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적어도 말을 하고 글을 쓸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용산참사를 노래한 ‘평범한 사람’(2009)처럼 이 사회가 겪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근작인 ‘가족’ 같은 노래를 듣다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란 확신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려서의 큰 아픔 없이는, 저런 꿈을 꾸진 않을 것이다.
유복하게 자란 것 같은데 남의 불행을 소재로 함부로 노래를 만들었느냐 라는 식의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상처 없는 사람 없겠지만, 나는 그게 반복되는 편이었다. 원망하거나 염세적으로 산 적 없지만, (극히 개인적인 아픔이 느껴지는 노래에는) 분명 배경이 있다. 사실 내 노래 중에는 가사를 붙잡고 늘어지기 좋은 것이 많다. 단순히 사랑했다 헤어졌네 식은 아니니까. 5집 낸 후에는 노래라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긴 적도 있었다. 왜 사람들은 내가 음반을 내면 음악적인 부분엔 관심이 없거나 무지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만 들쑤실까. 피로감이 쌓일 정도였다.

사람들이 루시드 폴의 가사에 집중하는 건 그만큼 가사가 특별해서다.
지금은 괜찮다. 한창 그럴 때가 있었다.

이번 음반의 마스터링을 담당했던 황병준 씨에 따르면, 외부적 장치를 최대 배제한 자연스러움이 콘셉트였다고. 마치 연주자들 사이에 앉아서 듣는 느낌이 들 만큼의 자연스러움 말이다. 과학과 음악의 병행을 끝낸 후, 전업 음악가로서의 데뷔작과 같았던 ‘레 미제라블’(2009)에서는 기존 음유시인 같은 면모를 벗기 위해 편성을 늘리고 구성을 다채롭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내밀하게 돌아간 데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
나는 참 못 해본 게 많다. 비유를 해보면 이렇다.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라면 자전거가 타고 싶으면 부모님께 사달라고 해서 타면 되는데, 그다지 여유 있는 가정이 아니다 보니 자전거가 타고 싶어도 탈 수 없었다. 빌려 타든, 뛰든 해야 했다. 나는 음악을 그렇게 해왔다. 내 동년배인 김동률이라든지, 이적 형이라든지, 그런 사람들은 어쨌든 메이저에서 데뷔하고 스물하나, 스물둘에 본인이 하고 싶은 편성과 구성에 최고의 세션맨들과 함께 작업하며 커리어를 쌓았다. 반면 나는 20대 후반에야 인디음악으로 시작했다. 오케스트라를 쓰고 싶어도 어떻게 쓰나? 건반으로 대신하든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늘 음악적 갈증이 있었다. (스위스와 한국을 오가며 만들었던 전작들과 달리) 전업이 되어 작업한 4집의 경우, 시간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5집을 낼 땐 더 화려하게 해보고 싶었다. 편성을 늘리는 것도 그렇고, 볼레로·룸바·플라멩코·삼바도 다 해보고 싶고. 그런데 이번 음반에선 딱히 무언가 새로운 악기나 편곡, 세션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더라. 그보다는 내 음악의 정서를 잘 이해하고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과 팀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피아노·베이스·나(기타와 노래). 이 안에서 다 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다른 기타리스트가 함께 하며 쿼텟 정도의 편성을 갖게 됐다.

전작들을 포함하여 루시드 폴의 곡을 듣다 보면 대부분 기타로 작곡한 것이 느껴진다. 피아노로 작곡할 때도 있나?
아니. 물론 일부 피아노로 쓴 곡은 있다. 그러나 피아노로 코드만 짚는 정도. 피아노에는 88개 건반의 88개 음, 여기에 또 수많은 결합음이 존재한다면, 기타는 여섯 줄에서 4개 현을 짚고 개방현을 친다고 해봤자… 피아노에 비하면 악기 자체가 미니멀리즘의 정수이다. 같은 화성이라도 건반으로 쳤을 때는 말도 안 되게 싱겁게 소리 나는 것들이 기타 특유의 울림과 배음이 더해지면 그 공명감이 정말 특별하다. 그래서 가장 의미 있는 악기로, 특히 대중음악 쪽에서 남아있는 게 아닐까 싶다.

가사는 언제 쓰고, 멜로디는 언제 붙이는가. 곡을 쓰는 과정과 순서가 궁금하다.
피아노로 곡을 쓰는 분들과는 다를 텐데, 기타의 경우 제한적인 조합을 하다가 생각지 못한 공명감의 진행을 만나게 된다. 심지어 코드를 명확히 정의 내리기도 애매한 그런 진행들. 그렇게 코드의 테마가 정해지면 그 테마를 계속 치면서 멜로디를 찾아 헤맨다. 가사와 멜로디는 자연스럽게 함께 만들어진다. 흥얼흥얼 끄적끄적, 흥얼흥얼 끄적끄적.

오늘날 가요가 지닌 의미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단번에) 모르겠다. (긴 침묵 후) 동서고금 막론하고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냈다. 시는 결국 노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노래는… 본능 같다. 문턱 없는 본능. 악기를 잘 다룰 줄 몰라도, 심지어 글을 몰라도, 노래를 부르고 싶은 본능이 모두에게 있다. 흥얼거릴 수 있다면, 거기에 자연히 익숙한 말을 섞고 싶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노래는 전 세계 어느 문화권에나 존재하는 문턱 없는 본능이다. 가요는 한국 사람의 노래이고. 본능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글 박용완 기자(spirate@) 사진 박진호(studio BoB) 장소 갤러리 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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