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제플린❷

록 음악의 가장 순결한 이름, 그리고 찬연한 역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9월 1일 12:00 오전


▲ ⓒ워너뮤직

록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높은 곳을 비행했던 레드 제플린의 전성기와 그들의 해체의 순간까지를 살펴본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1969년 9월, 내셔널 팝스 폴스에서 레드 제플린은 비틀스를 밀어내고 영국과 국외 부문의 정상을 차지했다. 멤버들은 록 전문지 ‘멜로디 메이커’의 인기투표에서 각 부문 1위를 차지했다. 1970년 10월에 발매된 레드 제플린의 3집은 그들의 음악적 정체성을 더욱 두텁게, 넓게 펼쳐 보여주었다. 앨범에는 블루스록·하드록의 기준으로 기술했던 1·2집의 결과물에 비해 어쿠스틱 사운드와 포크, 컨트리음악적 요소가 새로이 부착되었다. 로버트 플랜트의 작사가로서 비중도 높아졌다. ‘Immigrant Song’은 빌보드 싱글 차트의 16위에 등극했다. 12현 기타의 유려한 솔로를 앞세운 ‘Tangerine’은 그들의 최대 히트곡 ‘Stairway To Heaven’의 드라마를 앞서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다. 음악적 정수는 ‘Since I’ve Been Loving You’에 있었다. 고음에서 한없이 솟구치는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과 블루스의 흥취를 가득 머금은 지미 페이지의 자극적이면서도 여유로운 기타, 베이스와 드럼은 리듬의 에너지를 굳건하게 지켜주는, 레드 제플린식 블루스록·하드록의 표본이었다.

1971년, 미국·영국·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강행군 뒤에 레드 제플린은 세계 정복을 목표로 하며 첫 번째 일본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곧바로 네 번째 앨범을 구상했다. 그리고 새로운 앨범의 수록곡들을 라이브를 통해 사전 평가받고자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71년 7월, 이탈리아 밀라노의 비고렐리 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은 소요와 폭동이 되고 말았다. 1만 5,000여 명의 관객은 공연장에 불을 피우고, 집기를 부수는 과격 행동을 했고, 이를 제지하는 최루탄 연기 때문에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 라이브를 통해 미리 선보인 네 번째 앨범의 성공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4집 앨범의 빛나는 평가 중 가장 큰 지분은 ‘Stairway To Heaven’이 차지하고 있었다. 어쿠스틱 기타의 몽환적인 솔로 라인 위에 포개진 목가적인 피리 소리는 이 위대한 교향시의 고결한 인트로였다. 서정적인 발라드로 맺어도 충분했을 악곡은 후반부에 이르러 강렬한 하드록 사운드로 돌변·폭발함으로써 드라마틱한 기승전결을 갖춘 교향곡이 되었다. 발매 당시에는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 못했지만, 8분여의 대곡은 1970년대 미국과 영국의 라디오 방송국에 가장 많이 신청된 곡이었다. ‘에스콰이어’지의 집계에 따르면 1991년까지의 기록으로도 라디오 전파로 흘렀던 시간의 합이 무려 총 44년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각종 록과 기타 저널에서 선정하는 록의 명곡 부문에서 빈번하게 1위를 차지하는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시작곡 ‘Black Dog’는 보컬과 기타가 주고받는 콜 앤 리스폰스의 자극적인 화답이었다. 하드록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Rock and Roll’에서 터지는 로버트 플랜트의 가공할 만한 에너지 역시 전설이 되었다. 앨범에 맺힌 레드 제플린의 다양한 작법과 이를 향한 찬사에 대해 지미 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자평했다.

“그저 시끄럽게 볼륨만 높이는 그룹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진보하는 그룹이다.”

언제나 진보하는 그룹

1972년 2월, 레드 제플린은 호주의 시드니와 오클랜드에서 각각 2만 5,000여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이는 호주의 라이브 공연 사상 최대 관객 기록이었다. 곧이어 미국에서의 투어와 일본에서의 두 번째 투어를 마치고, 그해 11월과 12월의 유럽 투어 기간 동안 다섯 번째 앨범의 구상을 마쳤다. 1973년 3월, 세상에 공개된 레드 제플린의 5집 ‘Houses of The Holy’도 어김없이 미국과 영국의 앨범 차트를 점령했다. 처음으로 타이틀이 명명된 앨범이었던 5집에서는 네 명의 구성원이 음악 내용에 맞게 저마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배분했다. 이를테면 로버트 플랜트의 샤우팅 창법은 적재적소에서 사용되는 효과였으며, 지미 페이지는 더욱 다채로운 주법으로 신기의 테크닉을 은연중에 과시했다. 존 폴 존스의 베이스는 정공법에 입각하고 있었으며 존 보넘 역시 심벌 대신 공을 사용하는 등 사운드의 표현과 그루비한 리듬감을 안정되게 직조했다. 싱글로는 ‘D’yer Mak’er’와 ‘Over The Hills And Far Away’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20위와 51위를 각각 기록했다.

레드 제플린은 비틀스나 롤링 스톤스처럼 그들의 인기를 상승시키기 위해 TV 매체를 이용하지 않았다. TV의 음향과 영상이 그들의 음악을 온전하게 수용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레드 제플린의 음악은 철저히 앨범을 통해 전파되었고, 라이브를 통해 확산되었다. 1973년의 전미 투어는 400만 달러 이상의 입장료 수입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최고의 흥행 기록이었다. 1973년 5월 탬퍼 스타디움에서 달성한 약 5만 5,000명의 관객 수와 약 30만 9,000달러의 입장료 수익은 1965년 비틀스의 기록을 깨뜨린 기록이었다. 1974년에는 기존의 애틀랜틱 레이블과의 계약을 마감하고 자신들이 직접 설립한 레이블 스완 송을 출범시켰다. 1975년 2월에 발매된 그들의 6집 ‘Physical Graffiti’는 스완 송에서 발매된 첫 번째 레코딩이자, 1시간 22분 이상의 러닝타임을 담은 최초의 더블 앨범이었다. 11분여에 달하는 대곡의 블루스 넘버 ‘In My Time of Dying’을 비롯해 광폭한 드럼의 질주와 인도의 민속음악 선법을 도입한 ‘Kashmir’ 등이 수록되었다. 레드 제플린의 앨범 중 가장 도발적이고 강렬한 헤비메탈 사운드의 전형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의 2인 체제가 아닌 존 폴 존스와 존 보넘이 더해진 균등한 4각 체제의 음악이 곧 레드 제플린의 음악이라는 이상을 일깨워준 것이었다.

1975년 8월에 발생한 로버트 플랜트의 교통사고로 인해 약 1년동안 레드 제플린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1976년 3월, 휴지기를 딛고 발표한 레드 제플린의 7집 ‘Presence’는 독일 뮌헨에서 18일 만에 레코딩이 완료되었다. 앨범에 대한 평가는 다각도로 이루어졌지만, 전작보다 존 보넘의 드럼에 확대된 공간을 제공한 작업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Nobody’s Fault But Mine’에서 매겨진 그만의 비트 분할법은 종래의 블루스와 록 음악의 리듬에서 만날 수 없는 새로운 접근이었다. ‘Achilles Last Stand’ ‘Tea For One’ 등의 장엄한 대곡이 수록된 앨범은 싱글 발표와 순회공연을 통해 소개되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열광적인 지지자들에 의해 원래 그들의 자리였던 앨범 차트의 정상을 손쉽게 거머쥐게끔 했다.

TV를 통해 레드 제플린을 만날 수 없었던 아쉬움 때문에 그들의 라이브가 담긴 영화와 라이브 앨범을 희망하는 요구도 계속되었다. 1973년 5월, 순식간에 매진되었던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공연은 실황으로 레코딩되었다. 1976년 10월에 공개된 ‘The Song Remains The Same’은 위의 라이브 레코딩을 포함한 동명의 레드 제플린 다큐멘터리 영화의 사운드트랙이었다. 4장의 LP에 담긴 9곡의 곡은 라이브에서 한층 빛을 발하는 그들의 예술혼과 카리스마에 대한 엄준한 보고서가 되었다. 가감 없이 드러난 그들의 일상과 대화, 그리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그들의 음악적 태도 등은 레드 제플린의 신화를 직접적으로 설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초의 네 명이 아니면 레드 제플린이 아니다

1977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만 총 51회의 공연이 예정돼 있던 고단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해 6월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공연은 6일 연속 일정이었으며 총 12만 명의 관객이 들어찼다. 그러나 1977년 7월, “로버트 플랜트의 다섯 살배기 아들 클라크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레드 제플린은 예정된 투어를 즉시 중단했다.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가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인터뷰를 통해 모두의 조용한 기다림을 요구했다. 그리고 1년여의 공백 뒤에 로버트 플랜트는 레드 제플린으로 돌아왔다. 레드 제플린의 아홉 번째 앨범은 스웨덴 스톡홀름에 위치한 레코딩 스튜디오 폴라에서 레코딩되었다. 1979년 8월, 그들은 영국의 넵스 페스티벌에 출연, 이틀 동안 총 23곡을 연주함으로써 무대 위로 복귀했다. 8월 20일에는 통산 9집 ‘In Through The Out Door’이 전 세계 동시 발매되었다. 미국의 앨범 차트 정상을 7주간 차지함과 동시에 영국과 유럽에서도 폭풍처럼 차트의 정상을 잠식했다. ‘Fool In The Rain’ ‘All My Love’ 등에서 그들의 ‘헤쳐 모여’ 앙상블은 정교함을 더했고, 그루비한 리듬과 성숙과 노련을 덧입힌 독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80년, 모든 대중음악 매체는 1970년대를 레드 제플린의 시대로 정리했다. 그러나 1980년대는 레드 제플린의 것이 되지 못했다. 1980년 9월 25일, 존 보넘이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사인은 알코올 과다 복용에 의한 호흡 정지였다. 그의 장례식은 비밀에 부쳐 가족과 동료들, 그리고 8명의 팬이 참여한 가운데 조용히 치러졌고, 그해 12월 4일, 지미 페이지는 “친구의 죽음에 즈음하여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절감하고 더 이상의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레드 제플린의 10집이자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되고 마는 ‘Coda’는 1982년 세상에 공개되었다. 1970년부터 1978년까지 정규 앨범에 수록되지 않았던 미발표 음원을 추려낸 8개의 트랙은 이 위대한 비행선이 거닐었던 굵고 명료한 음악적 흔적에 대한 마지막 스완 송이었다.

존 보넘의 사망, 지미 페이지의 해산 선언, 그리고 마지막 앨범 ‘Coda’의 발표 이후에도 레드 제플린의 재결성에 대한 기대와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레드 제플린은 새로운 멤버의 영입을 통한 재결성을 고민하지 않았다. 1969년 결성해 존 보넘이 세상을 떠난 1980년까지 12년간 단 한 번도 멤버 교체가 없었던 레드 제플린이었기에 그들에게는 최초의 네 명이 아니고서는 레드 제플린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공통의 신념이 있었다. 단 한 번의 예외는 있었다. 2007년 12월 10일, 런던의 오투 아레나 공연장에서 열렸던 레드 제플린 ‘Celebration Day’ 콘서트가 그것이다. 레드 제플린이 해체를 선언한 지 27년이 지나서야 지미 페이지·로버트 플랜트·존 폴 존스는 한 무대에서 재회했다. 존 보넘의 빈자리는 그의 아들 제이슨 보넘이 메웠다. 이 뜻깊은 순간의 해후는 2012년 2CD의 앨범을 비롯해 LP·DVD·블루레이를 포함한 총 9개의 버전으로 남겨졌다.

레드 제플린의 해체 이후 생존 멤버 3명은 레드 제플린의 재결성에 대해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낱낱의 이름으로 이미 거장과 전설·신화의 이름으로 생존해왔지만, 불멸의 역사로 봉인된 레드 제플린의 관을 열지는 않았다. 레드 제플린은 1969년 야드버즈의 대안으로 태어난 이래 12년의 기간 동안 네 명의 아티스트가 함께 일구어온 공동의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2014년, 레드 제플린의 전 앨범 리마스터링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지미 페이지는 “리마스터링 작업을 통해 레드 제플린의 역사가 새로이 시작되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우리는 레드 제플린의 역사를 비로소 마감하고 있다”라고 응답했다. 글 하종욱

하종욱은 ‘좋은 음악에는 장르와 경계의 구분이 없음을 신봉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다. 공연 및 음반 기획, 연출, 제작, 집필, 강의 등 음악과 이웃한 일을 하고 있다

 

추천 앨범

 

Led Zeppelin IV

굳이 레드 제플린의 앨범 10장 중 한 장을 꼽으라면, 1971년의 4집을 권해야만 할 것 같다.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이라는 공인된 평가도 있지만, 레드 제플린이 지닌 광폭한 음악적 범위를 넓게 투사하고 있는 앨범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교향곡의 구조성과 미학을 지닌 ‘Stairway To Heaven’ 외에도 ‘Black Dog’ ‘Rock and Roll’과 같은 폭발적 에너지의 하드록 사운드, 그리고 만돌린 연주로 들려주는 아더왕의 전설 ‘Battle of Evermore’ 등 완전무결한 명곡들이 색색으로 박혀 있다.

Definitive Collection Mini Lp Replica CD Box Set

2008년 전 세계에 공개된 컬렉터스 아이템으로, 일본에서 발매되어 수입되었다. 레드 제플린의 정규 앨범 10장을 12장의 CD에 복원하되 오리지널 LP의 재킷을 미니어처 형식으로 재현했다. 말 그대로 레드 제플린 전집이면서도 영국에서의 오리지널 초판 재킷 이미지를 기본으로, 다종의 이미지로 발매된 1집과 7집의 재킷을 함께 수록, 소장 가치를 높였다. “레드 제플린의 음악은 시작과 끝을 완주했을 때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하다”라는 지론을 위해 강권한다.

2014 Jimmy Page Remastered Led Zeppelin

2014년 8월까지의 진행 상황은 1집에서부터 5집까지이다. 아마도 올해 안에 모든 앨범이 리마스터링될 것 같다. 2014년, 지미 페이지는 레드 제플린의 앨범을 리마스터링하는 대역사를 몸소 주관하면서 오랜 아쉬움을 씻어내는 듯하다. 새로운 시대와 기술을 보탠 리마스터링의 흔적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으로 태어난다. 어쿠스틱 사운드는 더욱 정갈하게 들리고, 과장되었던 잔향음 대신 튼튼한 중저음을 많이 보강한 모양새. 기존의 앨범에 수록되지 않은 미발표 음원을 수록하고 있음은 특별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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