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폴 캔터, ‘음악 너머, 사람을 향한 시선’

조진주의 THE ART OF PRACTIC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2월 1일 12:00 오전

나는 정의·사랑·정직 같은 가치들이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악함을 이겨내게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지나친 이상주의자라며 주위에서 타박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정석대로 가는 것이 결국 가장 빠른 길이며, 증오보다 박애와 자유가 인간을 구원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조금이라도 가식적인 것을 무척 견디기 힘겨워 할 뿐 아니라 ‘진짜’가 아닌 것에 대한 가치를 크게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정신적으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인지 꼽는 일은 그리 놀랍지도,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내 운명을 바꾸어놓은 단 한 명의 스승, 폴 캔터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상’의 힘을 믿도록 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지금은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그는 내가 쉴 새 없이 던지던 ‘왜?’라는 물음에 처음으로 함께 고민해준, 인생의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또한 단순히 재능으로만 대하던 ‘음악’이라는 것을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이끌어주신 분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음악적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쉬운 일도 아니다. 성자의 참을성, 에디슨의 창의력,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의 가능성을 믿는 긍정적인 태도까지… 가히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제대로 해낼 수 있다. 요즘 학생들을 위한 여름 음악 캠프를 준비하고, 오벌린 음대에 객원교수로 출강을 시작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캔터 선생님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수련의 진화 _지금 그만두거나, 미친 듯이 연습하거나

비교적 늦은 나이인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공립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시작한 폴 캔터는 아무런 강요 없이도 몇 시간 동안 계속 연습을 하는 조금 이상한(?) 아이였다고 고백했다.

“학생들이 연습하는 것에 대해 불평할 때, 사실 난 잘 이해되지 않았어. 바이올린을 늦게 시작하긴 했지만 음악이 내 인생의 중심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지. 심지어 부모님께 말씀드려 내 방을 지하로 옮겼어. 학교 가기 전 새벽에 연습을 하고 싶었거든. 5시에 일어나 1시간 30분 동안 연습을 하고 7시에 집을 나서곤 했지.”

동네 공립학교에서는 그럭저럭 재능 있는 아이로 주목받던 폴 캔터는 줄리아드 예비 학교에 도로시 딜레이의 학생으로 입학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줄리아드에서 첫 수업을 시작하던 날, 연습실에서 열심히 연주하는 중에 옆방에서 하이페츠의 연주가 들리더란다. ‘하이페츠가 학교에 왔다!’고 생각하며 인사라도 해볼까 싶어 옆방을 기웃거리는데, 다름 아닌 옆방의 연주는 그와 동갑내기인 이성주 교수였다고. 돌이켜보니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성주’를 혹시 아는지 제일 먼저 물어보셨던 기억이 난다.

“그 연주를 듣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던 생각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지금 그만두거나 미친 듯이 연습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 ‘너무 많이 늦었어. 이 차이를 언제 따라잡지?’라고 그때부터 생각했던 것 같아. 이런 생각은 머리에 들어오는 순간 떠나질 않지. 지금까지도 무언가를 더 열심히 해서 따라잡아야 한다는 느낌이 늘 어렴풋하게 남아 있단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미친 듯이 사는지도 몰라. 그래도 생각해보면 그 느낌이 내겐 원동력이었던 것 같구나.”

고등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학생을 가르쳐온 캔터. 그가 한 시즌 안에 가르치는 제자들을 헤아려보니 늘 스물다섯 명을 넘기곤 했다. 많을 때는 서른세 명까지도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출강하는 캐나다 토론토의 글렌 굴드 음악학교 학생들과 그 외의 개인 레슨까지 포함하면 족히 마흔 명 정도를 그는 항상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연주 활동과 갖가지 마스터 클래스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워커홀릭의 정석’인 캔터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데도 5분 이상 늦거나 시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다. 본인에게 누구보다 엄격한 그를 보면서 제자인 우리가 늑장 부리거나 연습을 게을리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행동과 관념의 수련 _바이올린이 아닌,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


▲ 2016년 여름에 시작하는 앙코르 체임버 뮤직 캠프를 알리기 위해 지난 11월, 폴 캔터 선생님과 콘서트를 함께 가졌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항상 놀라운 건 대부분의 아이가 가장 기초적인, 악기에 대한 기본자세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정말 흥미로운 음악적 선택을 한다는 점이다. 한국이나 유럽에서 온 아이들의 경우, 기초적인 틀이 정말 잘 잡혀 있지만 음악적으로 약간의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양쪽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지만, 예전부터 내려오던 ‘도제’ 시스템, 그리고 국가나 민족성에 바탕을 둔 음악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개인의 생각과 취향이 중요시되는 것은 21세기의 가장 큰 키워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개인의 스타일대로 음악과 테크닉을 꾸려간다는 생각은, 사실 그리 오래된 교육 철학이 아니니 말이다.

물론 소리를 내는 것에 있어, 기본적이고 물리적인 ‘팩트’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폴 캔터 같은 젊고 혁신적인 선생님들이 선두에 나서서 교육의 중심에 두는 것은 ‘선택’의 중요성이다. 무조건 어떤 시스템을 따라 악기를 하는 동안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이 갈리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발전시키고 자신의 취향 따라 원하는 음악의 비전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게 돕는 것은 직업의 선택이 다양해진 오늘날,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걸맞은 예술 교육인 것이다.

“우린 음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야.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지. 사람을 가르치는 거야. 어떻게 듣는지, 어떻게 배우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단다.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했듯, ‘숙고하지 않는 삶은 곧 가치 없는 인생’ 아니겠니? 그러기 위해서는 사려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법 또한 가르쳐줘야 해.”

캔터 선생님의 학생들은 정말 가지각색이다. 누구는 하이페츠나 오이스트라흐 같은 ‘올드 스쿨’의 굵고 풍부한 음색을 가졌는가 하면, 마치 바로크 음악 같은 순도 높은 음색으로 모든 음악을 해석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 모든 캐릭터의 학생들을 다른 방법으로 가르친다. 같은 스튜디오에 있는 학생들이 서로 경험담을 털어놓다 보면 각자 다른 선생님과 공부하는 것처럼 접근 방법의 차이가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누구와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나의 다른 모습들이 나오듯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야. 그 학생의 이슈들과 음악적 목표에 집중하고 이입하다 보면, 각기 다른 방식의 교육이 적용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음… 그러니까 너같이 고집 센 아이를 가르칠 때는 더욱더 이성적이고 설득력 있게 내 자신을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야!(웃음)”

선생님과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서 나는 전통과 시스템을 고집하는 커티스 음대로 진학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커티스라는 학교가 음악사에 기여한 거대한 존재감에 현혹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난 정말 어린애 같은 이유로 커티스로 향했다. 첫째 ‘이젠 나도 유명한 학교에 다니고 싶어’. 둘째, 당시 이별을 고한 첫사랑이 커티스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바보 같은 이유로 진학한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내가 지향하는 비전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익숙해 있던 나는 전통과 선생님, 그리고 학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커티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생각건대 이미 ‘아카데미아’의 학문적 접근이 익숙해 있던 내게 교과서를 읽기만 하는 음악사와 이론 수업은 다소 유치하게 느껴졌고, 나라는 연주자 자체를 바꾸려고 하는 실기 수업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들의 말도 안 되는 경쟁까지 더해져, 마치 학부모들이 주위에서 치고 박는 한국에 돌아온 듯, 숨이 막혔다.

당시 나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내 목표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참 독하게 치워내는 재주를 가진 것 같다. 커티스에서 일 년을 채우기도 전에, 나는 캔터 선생님에게 돌아가기로 마음먹었고, 과감하게 클리블랜드로 돌아왔다. 그 이후 선생님처럼 내가 던지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거나, 그 답을 같이 고민해준 사람은 제이미 라레도 선생님이 유일했다.

“음악적 문제 제기에 있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네게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건 선생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야. 누군가는 그걸 도전적으로 느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호기심을 갖고 물음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정말 학교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훗날 어른으로서 자기성찰이 어렵지 않을까? 인간이란 수동적인 행동에 쉽게 익숙해지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한 사람은 졸업 후 긴 혼돈의 시기를 거치는 경우가 많거든. 나는 학교생활에서 내 학생들이 전문 연주가로서 생활로 최대한 부드럽게 이행할 수 있기를 바란단다.”

마지막 수련 _음악을 향해 끝없는 ‘직구’ 던지기


▲ 바이올리니스트 폴 캔터는 이츠하크 펄먼·나이즐 케네디·길 샤함 등을 가르친 도로시 딜레이의 문하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30년 넘게 애스펀 음악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체임버 심포니 악장으로 참여했고, 페스티벌 음악학교를 통해 음악학도들을 만나왔다. 줄리아드 음악원, 뉴잉글랜드 음악원, 예일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라이스 대학교 셰퍼드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8년 이래 토론토 왕립음악원의 글렌 굴드 음악학교 상주음악가로 활동해온 폴 캔터는 2014년 미국 현악교사협회로부터 아티스트 교사상을 받았다

내가 실패할 때, 캔터 선생님은 그 일을 가슴 아프게 여겼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모든 과정, 즉 실패나 어려움이 한 사람의 성장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알았기에 그 실패를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던 것 같다. 더불어 그가 실패에 대한 실망감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기에 나는 애스펀 콩쿠르에 네 번 도전해 우승했고,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역시 세 번째 도전해 우승했다. 오히려 부모님이 이런 부분을 살짝 창피해하셨지, 캔터는 내가 몇 번을 넘어져도 일어나며 점점 더 강인해지는 것을 뿌듯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대중에겐 예술 교육에 대한 로맨스 혹은 환상이 있는 것 같아. 우리가 매일 즉흥적이고 화려한 것들을 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건 일이고, 특히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굉장히 많은 반복을 요구하는 일이니까. 심지어 이 반복적인 메시지를 계속 다른 방법으로 공략해 알려줘야 하니, 감정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무척 피곤할 때도 많지. 하지만 사회의 모든 사람처럼 나도 똑같이 내 자리에서 책임감을 갖고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단다.”

인터뷰를 핑계 삼아 캔터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은, 그가 정말 지치지 않고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하루 종일 학생을 가르치고 난 이후, 내가 학생들의 소리를 무의식적으로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건 당연한 일이라며, 그저 “소리를 다시 되돌리는 연습 시간을 더하면 된다”고 간단명료하게 답을 건넸다.

특별한 비법도, 속임수도 없이 음악이라는 세계에 끝없이 ‘직구’를 던지는 그분이 내 예술적 성장의 대부분을 책임졌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의 절반이라도 닮은 교육자가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멀었다. 그래도 이것만은 분명하다. 나의 롤 모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폴 캔터 선생님이고, 나의 목표는 그분처럼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정석의 교육자’, 그리고 음악인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글 조진주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는 한국에서 태어나 예원학교를 수석 입학, 재학 중 인생의 멘토 폴 켄터를 만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국 클리블랜드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커티스 음악원을 거쳐 다시 폴 켄터의 문하로 돌아가 클리블랜드 음악원 학사 학위를 마쳤다. 제이미 라레도 교수와 동 학교에서 석사, 전문사 과정을 마쳤으며 2014년 세계 3대 콩쿠르인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1위를 수상했다.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거리 공연 프로젝트 ‘클래시컬 레볼루션 코리아’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으며, 2016년 여름 음악 캠프인 앙코르 체임버 뮤직(ENCORE Chamber Music) 음악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동물을 사랑하고, 아이폰 중독자이며, 자연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TV 보는 것을 음악보다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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