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동반자인 부부가 음악의 길을 40년 함께 걸어왔다. 5월 18일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전곡 연주를 앞둔 문용희와 남편 이대욱을 함께 만났다
이대욱과 문용희는 60~70년대 잘 알려진 소위 엄친아, 엄친딸이었다. 유학이 흔치 않던 시절, 경기고와 경기여고를 나와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과 오스트리아 빈 국립 음대로 유학을 간 이들은 피아노 실력뿐 아니라 머리도 좋은 재원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주목받던 이 둘의 결혼 소식이 1975년 한 신문에 전해지면서 음악계는 새로운 음악가 부부의 탄생에 환호하며 축하를 보냈다.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은 물론 뛰어난 실력까지 겸비한 선남선녀의 만남은 그렇게 40년 동안 은은한 향기를 더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뤄왔다.
개인적으로 처음 부부의 두오 음악회를 본 건 2009년 명동성당에서였다. 2002년 한국인 최초로 피바디 음대 정교수로 채용된 문용희와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시향 상임 지휘자로도 활약하던 이대욱의 듀오 음악회는 그 자체로 음악계에 많은 관심을 모았다. 명동성당에 사람들이 가득 차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연주 스타일은 각자의 개성이 뚜렷했다. 슈만의 작품에서는 문용희의 섬세함이, 메시앙의 작품에서는 이대욱의 깊은 음악성이 빛을 발했다. 음색 또한 많이 달랐다. 문용희 교수가 선율 속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다면, 이대욱 교수는 온화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묘하게 조화를 이룬 무대. 그 모습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이들 부부는 서로의 다른 음악성을 어떻게 그토록 조화로운 하모니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문용희 교수의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전곡 연주를 앞두고 만난 인터뷰에서 이들은 꾸미지 않은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답변으로 7년전 처음 들었던 이대욱·문용희 두오 연주회의 잔잔한 여운을 되새기게 했다.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전곡 연주의 의미가 클 것 같습니다.
문용희 금호연세가 개관하면서 렉처 시리즈 공연의 일환으로 연주하게 되었는데 이 곡은 개인적으로 빈 국립음악원을 졸업할 때 연주했던 작품이라 더 의미가 깊어요. 어린 나이에 처음 이 곡을 배웠지만 나이가 들어 또다시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이 설레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네요. 연주를 준비하면서 예전에 알았던 것을 되새기고 새로운 것들은 다시 알아가는 즐거움이 생겼어요. 시간이 지나 다시 이 곡을 연주할 땐 또 다른 것들을 알아가고 다르게 연주하겠죠. 그게 연주의 맛인 것 같아요.
이대욱 교수님 역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 교향악 전곡 연주 등 베토벤과 인연이 깊으시죠?
이대욱 어린 시절부터 베토벤의 음악을 많이 듣고 많은 작품을 연주하고 공부해왔지요. 아내가 연주하는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고요. 베토벤이 평소에도 즐겨 작곡하던 형식이 변주곡인데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이야말로 그에게 변주곡에 대한 관심과 정열을 최종적으로 결론지어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연주에 관심을 갖게 된 게 우연인지 운명인지 아내를 만나면서 부터였어요. 그 시절 아내는 이 작품을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지요. 그때 아내가 연주하는 걸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나는 못하겠다’ 생각했죠.(웃음)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아내에게 이 작품을 연주해보라고 많이 격려하곤 했습니다.
이 작품의 매력이 있다면?
문용희 디아벨리가 쓴 간단한 왈츠를 가지고 이토록 훌륭한 대곡을 만들었다는 건 베토벤이 진정한 의미의 천재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하죠. 단순했던 왈츠의 하모니가 서서히 바뀌면서 결국은 내면에서 끌어낸 천상의 음악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건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 곡은 연주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새로운 세계에 빠져 들게 하죠.
이대욱 피아노를 연주하고 지휘를 하고, 또 가족들과 앙상블 연주를 하면서 베토벤의 주요 작품은 모두 만나보았어요.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피아노소나타 29번 ‘하머클라이버’와 함께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의 음악세계가 가장 진하게 묻어있어서지요.
베토벤 음악이 그토록 사람을 끄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대욱 작곡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는 각자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한 대가들이었지요. 바흐가 신앙에 의한 음악을 작곡했다면 모차르트는 천상의 음악을 작곡했고, 슈베르트는 맑은 영혼의 음악을 작곡했어요. 그런 면에서 베토벤은 가장 인간적인 작곡가였지요. 인간 감성의 다양한 면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삶 속에서 스스로 엄청난 갈등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승리의 휴먼 드라마를 완성했죠. 아마 그 삶의 과정이 우리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우리를 일으키는 힘을 지녔지요.
문용희 그래서 베토벤 음악이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영혼을 많이 위로해주는 것 같아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베토벤은 오로지 노력과 연구로 하나의 구조를 만들고 또 기획하며 음악을 완성해나갔죠. 모든 음악 양식을 통해 세상을 표현하던 베토벤이 디아벨리 변주곡에서 마지막으로 모든 걸 아름답게 내려놓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음악으로 빚은 행복의 조각들
두 분의 러브스토리를 듣고 싶은데요, 어떻게 만나셨나요?
문용희 1974년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연주회 때문에 뉴욕에 간 적이 있어요. 당시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유학 중인 친구 김승희(숙명여대 교수) 집에 함께 있었는데, 때마침 임원식 선생님이 줄리아드 음악원 유학생들 모임이 있으니 잠깐 왔다 가라고 하시더군요. 바로 그 자리에 남편이 있었어요.
이대욱 사실 우리 인연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죠. 1958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소년소녀 협주곡의 밤이라는 무대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5, 6학년과 중학교 1, 2학년 학생들이 오디션을 치러 선발되면 이 무대에 설 수 있었어요. 백건우, 정경화 같은 연주자들이 그때 그 무대에 함께 섰지요. 같은 해 그 무대에 아내와 섰는데, 사진을 보면 어린 시절 두 사람이 함께 찍혀 있어요.
첫인상은 어땠나요?
문용희 우린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어서 그렇지 예전부터 이름과 얼굴은 서로 알고 있었죠. 남편을 처음 봤을 때 참 좋은 사람 같은 느낌이었어요. 자상하고 따뜻한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죠.
이대욱 무엇보다 음악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같은 악기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도움이 많이 되었고요. 열정과 음악에 대한 진실한 마음, 피아노를 공부하는 방법을 얘기 하면서 내가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만나고 일 년 뒤에 결혼을 하셨네요.
이대욱 당시 아내는 유럽에 있었고 난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첫 만남 이후 바로 만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런데 우리 둘의 스승이었던 레온 플라이셔 선생님이 미국 인디애나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서머스쿨을 하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그렇게 연주 때문에 자주 보게 되면서 아내의 음악에 대한 열정에 많은 감명을 받았지요.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어요.
같은 악기를 부부가 한다는 것이 어떤가요?
문용희 서로 자신의 일을 잘 이해해주고 음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아요. 예술가가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아니기에 둘 다 음악가인 것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던 시절도 있었죠. 세상 물정에 어두워 일상생활을 하면서 손해 볼 때도 있었고요. 물론 서로 음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 덕에 많이 행복했어요. 특히 남편은 일하는 아내를 위해 공동 육아 원칙을 지킨 자상한 남편이고 따뜻한 아버지였죠.
이대욱 아내가 가정과 학교에서 힘들지 않도록 도와주려 노력했지요.(웃음) 결혼 전 부터 유학 생활로 혼자 지낸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집안일도 익숙한 편이었고요. 부부로서, 음악적 동반자로서 오랜 세월을 함께하다 보니 이제는 눈빛만 봐도, 연주 한마디만 들어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어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아내와 피아노 앞에 앉아 함께 연습하고, 음악적 색깔을 조율하는 과정 자체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자녀들도 음악가의 삶을 살고 있는데요.(장남 넬슨 리(이석준)는 바이올린을, 쌍둥이 딸 안드레아 리(이나연)는 첼로, 알리시아 리(이나경)는 클라리넷을 연주한다. 넬슨 리는 현재 주피터 스트링 콰르텟의 창설자이자 제1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세 자녀 모두 원래 음대에 진학하지는 않았다. 넬슨 리는 예일대 일반학부를 다니다 클리블랜드 음악원으로 옮겼고 안드레아 리는 예일대에서 역사를, 알리시아 리는 컬럼비아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문용희 우리가 음악을 했기 때문에 아이들까지 음악을 전공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악기를 배우는 건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기에 취미로 악기 레슨을 시켰죠. 항상 공부를 먼저 하고 악기 연습을 하도록 했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모든 분야에서 집중해 공부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 같아요.
이대욱 아이들이 어렸을 때 미시간 주립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그곳이 시골이어서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받기 어려웠죠. 그래서 악기를 가르치면 아이들이 좀 더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자라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어요. 그런데 운명인지 모두들 그 어려운 길을 자발적으로 가겠다고 하더군요.(웃음) 어쩌면 저 역시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이화여대 음대 교수 김성복)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늘 음악적 환경 속에서 자랐고, 그래서 결국 음악의 길을 가게 된 것일지 모르겠지만요.
부모님이 음악가인 환경의 영향도 컸을 것 같아요.
문용희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다 보니 당연히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다른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우리 아이들은 집에서 비디오로 카르멘 오페라를 보고, 바그너 작품을 들으며 자랐으니까요.
행복한 가정을 보고 많은 음악인이 부러워하는데,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대욱 요즘 시대는 아이를 잘 낳지 않으려 하는데, 생각해보면 아이가 많았던 것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힘이 되었어요. 예상치 않은 쌍둥이 딸을 낳고 키우느라 젊은 시절엔 힘도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다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며느리(첼리스트 데니즈 조키크)도 음악을 하고 있어서 우리는 이제 완전한 음악 가족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많다고 모든 가족이 다 행복하진 않잖아요.(웃음)
이대욱 우리 부부는 미국에 살면서 우리 식대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랑해주었어요.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고 잠재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죠. 결국 가족 간에 제일 중요한 것은 대화이지요. 아이들과 이야기할 때는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편하게 대화하려 많이 노력했어요. 가끔은 앙상블 연주를 하면서 음악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요.
문용희 육아와 학교 일을 하느라 정신없는 순간이 많았는데 남편이 가정 일을 많이 도와주었어요. 워낙 성품이 자상하고 따뜻해 주위에서 많이들 부러워했죠.(웃음)
요즘도 가족 모임을 자주 하시나요?
이대욱 크리스마스나 가족 행사가 있으면 가족들이 함께 만나 시간을 보내죠. 감사하게도 최근엔 귀여운 손자도 생겨서 우리 부부가 손자 재롱을 보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든든한 사람들, 그것이 가족이겠죠. 더구나 우린 모두 음악을 하고 있으니 이보다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 싶어요.
음악은 인간 존재의 탐구
두 분 모두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계신데, 세계 음악계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나요?
문용희 테크놀로지의 놀라운 발달이 음악계뿐 아니라 세계 문화계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지요.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아닌 여러 장르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고요. 컴퓨터 뮤직, 대중음악, 광고 음악을 비롯해 현대 작곡가들의 새로운 음악이 계속해서 음악계를 다양하고 역동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또 하나,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중국인들의 활약이 놀랍게 커져가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들의 교육열과 눈부신 성장이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긴장시키고 있어요.
이대욱 콩쿠르 심사에 가보면 중국인의 성장이 정말 놀라워요. 그러나 음악의 길은 평생 가야할 길이기에 젊은 시절 반짝 성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요. 좋은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역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문용희 시대가 바뀌면 교육 방법도 달라져야겠죠. 하지만 교육의 목표는 변함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결국 거울을 보는 것과 같아요. 연주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어떤 사람인지 그대로 반영되죠. 교육은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찾아 행복하게 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가르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을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는 마음과 관심이에요. 학생들도 저마다 머리를 쓰는 방법이 다르거든요. 환경과 성품, 취향, 지식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교육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죠. 그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과 재능을 찾아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거죠.
이대욱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각 나라의 교육제도나 시스템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비교도 할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연구와 연주의 균형이 가장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재 학생들의 연주 기량은 예전에 비해 굉장히 높아졌지만 음악에 대한 이해와 철학은 그만큼 따라주지 못한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음악 교육이 너무 한 방향으로만 치우쳤기 때문이지요.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음악은 물론 예술 전반의 분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죠.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균형 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음악이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이대욱 지금은 음악이 연주자의 뛰어난 기량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많지만 서양음악의 역사를 보면 음악은 철학·신앙·논리·과학처럼 사람을 가르치는 기본 교육 중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음악 속에 담긴 철학을 연구하고 사고하는 과정을 거쳐 음악의 기본도 우주의 원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음악을 공부하는 진정한 목표였던 것이지요. 훌륭한 연주가 많아지고 그것 역시 가치가 있지만 음악가도 테크닉을 쌓는 것 못지않게 음악의 본질적인 내용을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음악인들이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삶을 더욱 가치 있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 말로 음악의 본질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문용희 결국 작곡가가 음악에서 보여주려는 것 역시 사람의 삶,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이 더 깊어질 수 있는 것일 테고요. 베토벤을 준비하면서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어요, 클래식 음악 속에는 인간의 존재를 건드리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요.
같은 길을 걸어온 서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대욱 음악가로서 특히 피아니스트 부부가 된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가장 엄격하고 혹독한 청중, 평론가, 선생 노릇을 해주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타성에 젖지 않도록 해주었지요. 또 많은 대화를 나누며 예술적으로 서로 성장할 수 있었고요. 행복한 가정을 함께 일궈준 아내에게 감사하고 같은 음악가로서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문용희 남편은 늘 저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가정에서는 좋은 아버지로 아들로, 따뜻하고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음악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고요. 앞으로도 평생 음악 안에서 변함없이 열정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진 강태욱(Workroom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