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 ‘자연의 고고함을 닮은 음악, 황병기의 침향무’

해금 연주자 꽃별의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1월 1일 12:00 오전

어디론가 떠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이 계절에 가려고 아껴둔 안동으로 향하는 마음은 어느 때보다 설레었다. 봉화부터는 중앙선도 제대로 그려 있지 않은 도로를 타고 달렸는데,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구불거리는 길 옆 오목한 곳에서, 사과나무와 사과를 닮은 사람들이 가을을 살고 있었다

안동, 마음의 고향

나는 서울에서 났다. 하지만 기억 속 어린 시절의 시작은 거제도다. 초등학교를 가면서 서울로 잠시 왔지만, 일 년 후인 초등학교 2학년 때 안동으로 다시 이사를 갔고, 거기서 3년을 살았다. 안동에서 살던 집은 깎아지른 산 아래 작은 도랑을 끼고 있는 집이었다. 도랑에는 호박이 자라고 있었고, 개구리가 살았다. 세 가구가 같이 사는 집이었는데, 우리 집은 바깥채였다. 마당 가운데 펌프로 끌어올리는 수도가 있었고, 수도 옆에 장독대가 있었다. 집 한쪽 끝에 구식 화장실이 있었고, 부엌은 집 밖에, 그리고 연탄을 때는 아궁이가 있었다.

집은 야트막한 오르막 위였는데, 마을 뒤로 한참 가면 딱따구리가 사는 산이 있었다. 주말이면 아빠 손을 잡고 약수를 뜨러 산에 갔다. 양지바른 곳에서 동생과 씨름을 하거나, 뱀이 허물 벗어놓은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놀다가 아빠가 손짓을 하면 가만히 앉아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를 들었다. 매일매일 신나게 놀았다. 동네 꼬맹이들과 고무줄놀이나 숨바꼭질을 하다가 엄마가 부르면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겨울에는, 특히 밤에는 화장실 가는 것이 싫었다. 바깥에 있는 화장실은 너무 추웠고, 깜깜했고, 무서웠다. 동생을 깨우다 일어나지 않으면 엄마를 깨웠다. 어느 날, 볼일을 보고 나와서 하늘을 보니 별들이 내 눈 속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까만 하늘의 별들은 그야말로 반짝거렸다. 엄마의 옆구리에 꼭 붙어 엄마의 손가락을 따라 별자리를 배웠다.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과 알파벳 더블유 모양의 카시오페이아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카시오페이아라는 말은 아마 친구들 중에서 나밖에 모를 거야’라고 생각하며 몇 번이고 되뇌던 기억이 난다.

구구단은 하회마을에서 외웠다. 작은 바위에 앉아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7단을 써놓고, 지웠다가 다시 쓰면서 시험을 봤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도산서원이며 낙동강, 안동댐 등으로 놀러 나갔다.

안동에서의 3년. 지금 생각해보면 길지 않은 시간인데, 그때는 시간이 참으로 느리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나의 마음에 동심이 남아 있다면 그건 대부분 안동에서 만들어진 마음일 것이다.

獨倚山窓夜色寒 독의산창야색한
梅梢月上正團團 매소월상정단단
不須更喚微風至 불수갱환미풍지
自有淸香滿院間 자유청향만원간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기운 차가운데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이 걸렸구나
구태여 산들바람 청해서 무엇하리
맑은 향기 저절로 뜰 앞에 가득 차네
– 陶山月夜詠梅(도산월야영매-도산, 달밤의 매화를 노래함), 퇴계 이황

소박하고 고요한 도산서원

퇴계를 좋아하게 된 건 돌아가실 때 남긴 말씀이 ‘매화에 물을 주거라’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다. 그 전에는 그저 우리 역사의 한 위인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유학의 정수이자 청빈하고 고아한 퇴계 이황. 중종, 명종, 선조에 걸쳐 왕들의 극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왕들의 끊임없는 부름에도 낙향해 1561년 도산서당을 짓고, 수양과 독서, 저술에 힘썼다. 도산서원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서당 위쪽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 동안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었다. 햇볕은 강물 위에서 부서졌고, 억새는 거의 투명해 보일 정도로 아름답게 흔들렸다. 모퉁이를 돌자 왼편으로 산에 안겨 있는 듯한 도산서원이 나타났다. 반듯한 터 한쪽에는 땅에 닿을 듯 구부러진 고목이 여전히 당당했고, 도산서원은 소박하고 얌전했다. 계단을 올라가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문을 들어설 때는 머리 위쪽에 한참 공간이 있는데도 몸을 숙였다.

오른쪽으로 도산서당이 있었는데 정말 작은 규모였다. 간신히 한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듯한 방에는 완락재(玩樂齎)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즐겨 완상하니, 이 몸이 평생 지내도 충분하겠다’는 뜻으로 주희의 ‘명당실기’에서 따온 말이다. 소박하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협소한 방에 이런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에 깊은 존경심이 생겼다. 하긴, 커다랗고 화려한 방에는 더욱 어울리지 않을 이름이다. 서당 옆문 바깥에는 생전에 좋아했다는 매화나무가 심어 있었다. 가끔 술을 마신 저녁에는 매화를 매형이라고 부르며 흥취를 나누었다고 한다.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그런 낭만이 있었다는 것에 내 마음은 더욱 흔들거린다. 서당 마루에서 낙동강 물을 바라보기 위해 담을 낮게 쌓았다고 한다. 아마도 깊은 학문 뒤에는 자연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도산서원에 올라 한석봉이 쓴 현판 아래 앉으니 제법 멀리까지 보였다. 마루 깊숙이 볕이 들어 바닥에 온기가 돌았다. 가을볕은 사람을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만히 앉아 세상을 바라보니 나의 어린 시절과 지금 마당에서 속닥거리는 아이들이 겹쳤다. 그때는 시간이 참 느리게 흘렀는데, 지금은 어떤 속도로 살고 있을까. 마주하고 있는 고요함 속에서도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조급했다.

자연을 닮은 음악, 황병기 명인의 ‘침향무’

어떤 음악은 들으면서 몸과 마음을 풀 수 있고, 어떤 음악은 풀어져 있던 몸과 마음을 충전시켜 마치 재조립하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해 음악은 우리 몸의 나사를 풀기도 하고 조이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이 음악을 듣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 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음표 중 단 하나만이라도 다른 것을 짚어선 안 된다는 것. 그만큼 꽉 짜인, 완벽한 음악. 그때 느낀 놀라움을 지금도 종종 떠올린다. 그에 비해 우리 전통음악은 좀 다르다. 작곡가에 의해 이미 완벽하게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해석과 표현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음악을 완성에 가깝게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음악은 분방하고, 무한하다. 그것이 우리 음악의 핵심인 것이다.

하지만 무한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중간쯤에 서서는 그 만족감을 얻기가 어렵다. 베토벤의 작품은 온전히 그 연주를 해냄으로써 그 음악이 가진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지만(물론 뛰어난 표현력과 풍부한 감성이 더해져 작곡가가 악보에 구현하지 못한 것까지 담아내는 것에 더욱 감동을 느끼지만), 우리 전통음악의 산조나 시나위에서는 우선 악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악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 쓸 수 없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이런 점이 참 어려웠다. 내가 배울 때는 악보가 있었는데도,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연주의 발끝에도 닿지 못했고, 선생님들의 가르침에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 가령 누군가를 잃은 슬픔이라든가 격렬한 사랑의 아픔 같은 것들을 연주에 담아내라는 다소 무리한 요구가 있었다. 그래서 특히 산조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달라지는 연주라고 한다. 세월이 담기지 않은 테크닉으로는 절대 채울 수 없는 공백이 있다. 이런 전통음악의 특징은 나를 답답하고 막막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찌르르하게 만들었던 음악이 황병기 명인의 ‘침향무’다. ‘침향무’의 선율은 매우 고고하다. 첫눈을 맞은 매화처럼, 매초롬하면서도 보드랍다. 처음 들은 것은 가야금을 전공하는 친구들의 연주였다. 고등학교 때였는데, 해외 공연을 가게 되면서 준비한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나는 물론 해금을 연주했지만, 우리 중엔 장구재비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침향무’에서 장구 반주를 하게 되었다. 첫 연습을 하는데,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장구가 어찌나 섬세하게 적혀 있는지, 가야금 선율을 잠시라도 놓치면 안 되는 악보였다.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음악, 하지만 그것이 또 얼마나 절묘하게 맞아지고 이어지는지, 연습 내내 신이 났다.

온 생애를 다 바쳐 만들어가야 하는 음악에는 떨칠 수 없는 무게가 있다. 하지만 ‘침향무’는 어딘지 가뿐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순수함이 있다. 퇴계 선생의 마지막 말인 “매화나무에 물을 주거라”처럼. 미련이나 얽매임이 없는 현자의 뒷모습 같다. 그래서일까. ‘침향무’를 들을 때만큼은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자연의 위대함이라든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자연의 순환과 치유력을, 인간은 닮고 싶은 것이라고. 그런 간절함 때문에 사람은 계속 발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빠른 것, 더 편한 것, 더 보기 좋고 먹기 좋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지나친 염원’이 우리의 눈을 멀게 했던 건 아닐까. 길옆에 핀 작은 꽃들과 불어오는 바람 따위는 느끼지 못하고 저 먼 곳을 향해 뛰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놓치고 있던 것. 중간 과정을 치열하게 지나느라 오히려 잊고 있던 첫 마음 같은 것을 더듬어본다. 도산서원을 나와 강 앞에 앉아 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침향무’를 듣는다. 음악처럼 물은 한시도 쉬지 않고 흐르지만, 고요하다. 바람과 볕이 몰고 온 가을이 물결에 담겨 있었다. 이 물이 어김없이 흘러 아주 먼 훗날에도 누군가 이 앞에 앉아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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