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송영민, 틀을 깨면 보이는 것들

간절함과 감사, 열린 시선으로 매 순간 또 다른 예술가의 길을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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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3월 4일 9:00 오전

BEYOND THE MUSIC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끝이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내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한다. 피아니스트 송영민과 이 질문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인 듯하다. 자신을 찾고자 하는 간절함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고, 모든 기회와 배움에 대한 열린 마음이 또 다른 기회,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정확히 바라보고 나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더없이 단단해 보인다.

부산 소년의 러시아·독일 유학기

지금은 일 년 열두 달을 바쁜 스케줄로 정신없이 보내고 있는 그이지만, 첫 시작부터 그리 거창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온갖 사교육을 다 시키셨어요. 그중 유일하게 그만두겠단 소리 없이 계속 배웠던 것이 피아노였고요. 하루는 피아노가 좋으면 이걸로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부모님 잔소리 없이 내 마음대로 살 수 있겠단 어린 생각에 아무것도 모른 채 유학을 결심했죠.”

만으로 열셋, 송영민은 그렇게 러시아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첫 시작은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같은 대도시가 아닌 기차로 서른 시간을 넘게 가야 나오는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였다. 작은 도시였지만 음악원에서 제대로 된 레슨을 처음 받아본 그가 거의 꼴등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이에 홀로 타지 생활을 견뎌냈고, 러시아어를 잘하지 못해 손짓 발짓으로 레슨을 받았다. 하지만 성실함으로 음악에 임했던 송영민은 입학 후 첫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그 후로 계속 1등을 유지하며 음악을 바라보는 자세를 다듬어 갔다. 이후 예카테린부르크 영재음악학교로 전학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독일로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러시아 유학 시절 ‘객석’과 ‘피아노 음악’에 실린 다양한 기사들을 보며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던 중 두 잡지에 실린 독일의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풍경에 마음이 끌렸죠. 기사에 실린 선생님들의 프로필에도 독일에서 공부했다는 내용이 많더군요. 데트몰트 국립음대에서 공부를 시작한 이유도 당시 활동하던 연주자들의 프로필에서 가장 많이 본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웃음)”

만 14세에 러시아에서 첫 독주회도 열고 좋은 성적을 유지해온 그였지만, 독일에서 마주한 현실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데트몰트에서의 첫 일 년이 가장 슬럼프였습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그에 비해 저는 아무리 해도 느는 것 같지 않았죠. 정체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주변에서 들리는 이야기가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너는 인맥도 학연도 지연도 없으니 한국에서 생활하기 어려울 거라는 말. 당시 스무 살이었던 제게 너무나 큰 압박이었고, 결국 피아노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송영민의 생각은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연주를 통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런 피아노는 태어나서 처음 들었던 것 같습니다. 연주를 듣는 순간 ‘나는 저렇게 될 수 없겠구나’라고 느꼈지만, 이렇게 좋은 걸 하지 않으면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욕심을 내려놓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지만, 갑자기 실력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영화 같은 일은 없었다. 여전히 연습실에 갇혀 별로 달라질 것 없는 시간을 계속 보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자신을 다져온 송영민이 빛을 내기 시작했던 것은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에서였다. 최고연주자과정으로 게랄드 파우트를 사사하며 김다솔·원재연·김희재 등과 같은 클래스에서 수학한 그는 이 시기가 자신의 터닝포인트라 말한다. “악기를 하며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갑자기 실력이 느는 일은 정말 드문데, 그런 드라마틱한 일이 제게 일어났습니다. 지금 쓰는 프로필의 절반 이상이 다 그때 채워졌지요. 당시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피아니스트 원재연입니다. 동생이지만, 진심을 다해 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죠. 저는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부족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다른 시각이 만들어낸 길

한국에서 피아니스트 송영민을 알리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아마도 드라마 ‘밀회’가 아닐까. “오디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것이 내 인생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순간적인 확신이 들었습니다. 드라마 속 연주가 모두 클래식 음악이라는 점 또한 확실한 계기를 주었죠. 지정곡을 밤새 연습하고, 이미지도 최대한 주인공과 비슷하게 꾸미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드라마가 흥행하며 자연스레 피아니스트 송영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졌고, 이는 또 다른 영화와 공연, 그리고 음반의 기회로 이어졌다.

따스한 음악만큼이나 귀를 사로잡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과 말솜씨, 그리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은 그에게 더욱 다양한 역할을 가져다주었다. 해설과 함께하는 음악회를 수차례 진행해온 그는 현재 ‘최인아책방 콘서트’, N.W.A 영 피아니스트 콘서트 시리즈 등 여러 공연과 페스티벌을 기획하며 프로듀서로서의 꿈 또한 차근히 밟아가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좋은 프로듀서, 행정가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모두가 인정할 만큼의 연주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조금씩 바뀌고는 있지만, 아직은 음악을 잘 모르거나 전공하지 않은 분들이 행정을 맡고 결정권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연주자 출신의 행정가가 있다면 현장의 이야기와 고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축구 선수 생활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감독을 할 수 없는 것처럼요.” 그는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카네기홀의 대표로 40여 년을 지낸 아이작 스턴을 예로 들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는 좁은 시야를 깨고 나와 실질적으로 내가 사회에 나왔을 때 음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유명 솔리스트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하고요. 저도 연주자로 살고 있지만, 방송·영화·라디오·기획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두려움을 내려놓고 조금만 틀을 깨고 나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송영민은 오늘도 새로운 계획들로 바쁘다. 여러 독주와 협연, 실내악 연주는 물론이고, 플루트·타악기와 함께 앙상블 팀도 구성할 예정이다. 올가을에는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뮤지컬도 선보이고, 쇼팽 전곡을 녹음하는 7년간의 장기 음반 프로젝트도 이미 진행 중이다. 천천히 피운 송영민의 꽃은 그 시간만큼이나 단단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시간과 함께 그 꽃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더 멀리 퍼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빛깔의 무언가로 피어날 것이다.

글 이미라 기자

 

성기선/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

(협연 송영민)

3월 2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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