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 가장 의미있는 울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3월 8일 9:00 오전

MEET THE ARTIST

 

 

플루티스트 최나경이 만난 세계의 음악인 ⑦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

가장 의미 있는 울림

 

바이올린을 든 그녀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깊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당시 17세였던 힐러리 한의 데뷔 음반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대부분 어린 연주자의 첫 음반이라고 하면 현란한 테크닉을 뽐내는 비르투오소 곡들을 내놓기 마련인데, 혜성처럼 나타난 이 소녀는 어른들도 소화하기 어려운 바흐, 그것도 무반주곡들을 담담하면서도 당당하게 표현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그녀의 음반 레퍼토리는 베토벤·번스타인·바버·에드가 마이어·브람스·스트라빈스키 등의 굵직한 곡들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연주와 계속되는 창의적 프로젝트로, 힐러리 한은 클래식음악계에 없어서는 안 될, 아이콘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거듭났다. 힐러리 한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예원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어느 음악 잡지의 표지로 등장한 그녀의 이야기에 감명받아 즉시 음반을 구매했고, 바흐 연주에 완전히 매료되어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그녀와 상상 속 친구가 되었다. 일 년 후, 입학 오디션을 위해 커티스 음악원에 들어서면서는 “여기가 바로 힐러리 한의 학교구나”하는 벅찬 감격을 먼저 맛봤을 정도다. 힐러리 한이 10세 때부터 다녔다는 커티스 음악원. 전 세계에서 몰려온 뛰어난 음악도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당시에도 모두의 롤모델이었던 그녀에 대한 일화들은 거의 신화에 가까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겸손하면서도 밝은 성격의 그녀는 친구들도 많았고,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도 좋아했다. 연기를 배워보고 싶다는 그녀의 제안에 커티스 음악원에서 연기 수업도 만들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이후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힐러리 한을 만날 수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연주는 깊이를 더하고 빛을 발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특별히 더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꾸준히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곡을 위촉하고, 학생들을 위해 연습하는 모습을 매일 보여주는가 하면, 엄마와 아기를 위한 콘서트나 인공지능(AI)과 클래식 음악의 만남을 주선하고, 여성 인권을 지지하고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목소리까지 내고 있다. 용기와 소신 있는 그녀의 한 걸음 한 걸음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제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 역할까지 해내며 명실상부 ‘슈퍼우먼’의 대열에 오른 힐러리 한. 오랜만에 새로운 음반으로 반갑게 우리 곁을 찾아온 그녀를 랜선으로 만나 보았다. (영상 인터뷰는 QR코드 참조)

 

시대를 연결해 준 파리에서의 인연

새 음반 ‘파리(Paris)’(DG)의 발매를 축하한다! 녹음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에서 2018/19 시즌 상주음악가로 있을 때 함께 녹음한 음반이다. 10대 때부터 정기적으로 같이 연주해온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음악감독이 바뀔 때마다 어떻게 변하고 발전했는지도 보아왔는데, 핀란드 출신의 미코 프랑크가 부임하고 나서 오케스트라가 더 견고해진 것을 느껴 녹음을 결정했다. 음반에 소개된 글에서 쇼송·프로코피예프·라우타바라의 곡이 어떻게 파리로 연결되었는지 흥미롭게 읽었다. 쇼송의 ‘시곡’은 스승(야샤 브로드스키)의 스승인 외젠 이자이에 의해 초연되었다. 세계초연이 이뤄진 것은 벨기에였지만, 파리에서의 초연이야말로 쇼송이 작곡가로서 이름을 크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삶의 오랜 시간을 파리에서 보냈고, 그의 협주곡 1번 역시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핀란드 출신 작곡가인 라우타바라(1928~2016)는 나를 위해 쓰고 있던 이 곡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타계했는데, 그의 제자인 칼레비 아호(1949~)가 나머지 오케스트레이션을 끝내 파리에서 미코 프랑크의 지휘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초연했다. 의도적으로 파리와 연관된 곡을 찾은 건 아니고, 녹음하고 싶은 곡을 고르고 보니 모두 파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앨범 타이틀도 그렇게 정했다. 심지어 당신의 악기도 파리 출생(1865년산 장 바티스트 뷔욤)이다. 악기가 만들어진 곳의 주소를 보고, 지금은 편의점이 들어선 파리 한복판을 찾아갔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이번 음반에서도 작품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긴 했지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경험담으로 청중을 이끄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완전히 새롭게 연주를 듣도록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 중이다. 종종 에세이를 쓰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곡을 설명하는 것은 음악학자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박식한 음악학자일수록 한 문장을 써도 그 안에 아주 큰 그림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잘 알려진 곡과 그렇지 않은 곡을 함께 음반에 담는 것이 이제는 힐러리 한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많이 알려진 곡만 녹음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음악가로서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기는 곡을 녹음해야 한다. 또한 같은 시대, 비슷한 스타일의 작곡가들을 하나의 음반에 담는 건 지양한다. 내가 평소에 음악을 듣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비슷한 느낌의 음악을 연속해서 듣기보다는 아방가르드 음악을 듣다가 텔레만을 듣는 등 모든 시대의 음악을 고루 듣는다.

힐러리 한의 데뷔 음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1번 2악장

최나경 인터뷰 영상

힐러리 한 인스타그램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련의 과정

‘100일간의 연습(100 days of practice)’ 시리즈를 벌써 네 번째 진행하고 있다. 연습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보통 어떻게 연주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는 있지만, 그곳에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우리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연습을 하는 것이다. 무대에서 볼 수 있는 이미 완성된 연주보다는 거기까지의 긴 과정을 나누고자 시작한 프로젝트다. 연습을 녹화하고 공부하고 거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스스로 많이 배웠다. 다음날이 되면 어제의 연습을 돌이켜보고 어떤 부분을 더 연습할지 미리 계획한다. 이전에 연습하던 방식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악기를 해온 우리는 ‘자기 비판(self-criticism)’에 익숙하다. 마치 거울을 보며 완벽하지 않은 모든 부분에 집착하면서, 다음번에 밖에 나갈 땐 그걸 다 고쳐서 나가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천천히 발전시키고자 하는 게 건강하다. 나 역시 시행착오를 겪었다. ‘100일간의 연습’을 진행하면서 ‘레슨을 위한 연습’ 혹은 ‘공연을 위한 연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경이로울 만큼 정확한 음정으로 연주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음정에 대해 늘 연구하고 노력한다. 지금은 내 귀와 손가락이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귀를 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몸의 자세도 큰 영향을 끼친다. 연주 때 아드레날린 때문에 몸과 손가락이 긴장되면 그로 인해 정확한 음정을 잡는 것이 힘들어진다. 이를 방지하려면 평소에 연습할 때 최대로 손가락을 이완하는 습관을 길러두어야 한다. 귀에 가장 편안하고, 가장 울림이 좋고, 나의 영혼을 평온하게 해주는 음정이 좋은 음정이다.

온라인으로 대화 나누는 최나경과 힐러리 한

파리(Paris) 힐러리 한(바이올린)/미코 프랑크(지휘)/ 프랑스 라디오 필하모닉 DG 4839847 쇼송 ‘시곡’ Op.25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라우타바라 세레나데 1·2번

 

내 안의 세상이 아닌 세상 속의 나

신동에서 프로 연주자로 잘 옮겨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무대 위에 서는 화려한 순간은 일상이 아니다. 그곳에서 내려왔을 때의 평범한 시간이 일상이란 걸 배울 수 있게끔, 커티스 음악원에서 늘 보살펴 주었다. 또, 모두가 있는 세상 안에 비로소 자아가 존재함을 배웠다. 매니저들은 모든 결정에 앞서 반드시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혹사되지 않게 도와주었다. 추측하건대, 많은 어린 연주자가 자기 생각과 의견을 구축할 겨를도 없이 어른들에 의해 오랫동안 휘둘리다 보면 좋지 않은 결과가 초래되는 듯하다. 어릴 때부터 많은 시간을 혼자 연습하며 보낸 클래식 음악가들은 주변이나 사회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당신의 모습이 늘 본보기가 된다. 연주자로서 우리는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루에 한 시간만 연습해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것들이니 말이다. 그 어려운 과정에서 선생님이나 선배가 말하는 것이라면 모두 진리라고 믿으며 배움을 얻곤 한다. 하지만 학업을 마치고 세상에 나오면, 선생님 세대와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 놓인다. 윗세대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다음 세대에게는 어떤 것을 더 발전시켜 전해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클래식 음악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어딘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하기보다는, 각자 믿는 것을 세상과 나눈다면 클래식 음악계는 훨씬 건강해질 것이다. 또, 음악을 매개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결국 예술의 중심엔 사람이 있다.

 

최나경 동양인 최초, 여성 최초로 빈 심포니의 플루트 수석을 역임하고, 현재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며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유튜브 채널 ‘Jasmine Choi 최나경’에서 연주·인터뷰 영상, 플루트 전공자들을 위한 영상으로 팬들과 소통하고 있으며, 지난해 9월부터 월간객석 ‘Meet the Artist’ 시리즈를 통해 글과 영상으로 세계 음악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힐러리 한 내한공연

6월 중 예술의전당·롯데콘서트홀

 

힐러리 한(1979~)은 10세에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해 야샤 브로드스키를 사사했고 17세에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음반(소니 클래시컬)으로 데뷔했다. 공연과 음반 외에도 블로그와 유튜브 등으로 팬들과 소통을 시작한 클래식 음악계의 초기 아티스트 중 한 명이며, ‘100일간의 연습’을 비롯해 ‘투어 중에 보내는 엽서’ 시리즈, 27명의 작곡가에게 위촉한 ‘27곡의 앙코르’, 엄마와 아기가 함께 하는 ‘베이비 콘서트’ 등 신선하고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선보여 왔다. 그래미 어워드를 세 번 수상했고 그녀에게 헌정된 제니퍼 히그던(1962~)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퓰리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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