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장과 악장 사이, 쥐어짜는 헛기침보다 연주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건 어떨까
기침 | 기도의 점막이 자극을 받아 갑자기 숨소리를 터트려 내는 일
목소리를 가다듬거나 목구멍에 걸린 가래를 떼기 위해
일부러 숨을 터트려 나오게 하는 일
박수 | 기쁨·찬성·환영을 나타내거나 장단을 맞추려고 두 손뼉을 마주 치는 일
친구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에게 ‘생애 첫 음악회’를 선물했다고 한다. 내가 아이에게 첫 공연 관람이 어땠느냐고 묻자, 아이는 기침한 것이 제일 재밌었다고 한다. 듣고 보니 악장 사이마다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헛기침’이 에티켓(?)인 줄 안 것. 그래서 이 꼬마 관객도 사람들을 따라 열심히 기침을 해댔다는 것이다.
음악회장 내 소음의 복병
기침이라는 존재는 아다지오 악장에, 그것도 흐느껴 우는 듯한 ‘피아노(p)’나 애잔한 ‘피아니시모(pp)’에서만 튀어나오는 것 같다.
예술의전당 로비에 비치된 사탕, ‘목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울 때 손가락으로 목젖 부위를 가만히 누르면 증상이 호전’된다는 정보를 담은 한 공연 기획사의 프로그램 북, 기침을 참아달라고 정중히 제안하는 공연 전 안내방송까지 모두 기침에 대비한 예방책이다. 그런데 기침 예방용 사탕 비닐을 벗기는 소리에 신경 쓰인 적도 많았다.
기침 소리는 음악회장의 복병이다. 그 소리 때문에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잘못하면 ‘감기 걸린 겨울 나그네’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마크 패드모어의 내한이 있던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의 분위기가 그랬다. 아마도 슈베르트가 살아 돌아와 객석에 있었다면, ‘겨울 나그네가 너무 무리하게 방랑하다 감기에 걸렸나?’ 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관객의 기침이 곡과 곡 사이를 누볐다.
그런데 공연 중간에 나오는 기침보다 분위기를 흐리는 건 악장 사이에 관객이 내뱉는 기침이다. 이런 기침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연주 내내 참았다가 하는 ‘인내형’, 연주 중간에 기침을 참는 고통을 알기에 미리 뽑아내는 ‘예방형’, 너도나도 하는 군중심리에 이끌려 슬쩍 따라 하는 ‘모방형’, 모방형 기침이 이쪽저쪽으로 번지면서 경쟁하듯 일어나는 ‘경쟁형’ 등이다.
악장 사이의 침묵은 악곡을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연주자에게나 청중에게나 음악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작동한다. 청중은 직전 악장에 대한 잔상을 서서히 지워내고, 다음 악장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다. 음악회장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연주자들도 가능한 한 소리를 내지 않으며 악보를 넘기고 땀을 닦고 다음 악장을 조심스레 준비한다.
하지만 한 악장이 끝나자마자 관객은 해방된 자의 ‘외침’처럼 ‘기침’을 할 때가 있다. 3월 14일 서울시향에서도 이 외침은 어김없었다. 라하브 샤니가 지휘했던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의 각 악장이 끝날 때마다 기침이 쏟아졌다. ‘콜록콜록’이라는 의성어는 애교에 불과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3층까지 가득 메운 관객이 무대로 쏟아내는 기침 소리는 ‘와장창’ 혹은 ‘우르르’라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경사진 관객석이 쏟아내는 소음의 산사태였다. 음악회장을 처음 찾은 것처럼 보이는 관객도 ‘기침 바다’가 된 객석을 둘러보며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금기시하는 악장 간 박수를 연주자들에게 보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든 순간이었다.
건조, 경직, 침묵이 만들어내는 기침
세상에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사랑, 가난 그리고 기침이라 했던가. 기침은 기도의 점막이 자극을 받아 갑자기 숨소리를 터트려 내는 일이다. 반면 헛기침은 인기척을 내거나 목청을 가다듬거나 하기 위해 일부러 기침을 하는 행위다. 헛기침은 영어로 ‘throat clearing’이라 쓴다. 말 그대로 목이 답답하기에 스스로 목을 짜내 그것을 해소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다.
기침이든, 헛기침이든 공연장에서 왜 기침을 하는 걸까. 일단 건조하기 때문이다. 가을철에는 평소에 없던 정전기도 생기게 하는 것이 공연장 내 마른 공기다. 이런 것에 대비해 두산아트센터 같은 곳에서는 천장의 가습기를 작동해 예방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이유. 악장 사이에 몸을 풀기 때문이다. 음악회장에선 작은 미동이라도 타인의 감상에 큰 방해가 된다. 따라서 몸은 어쩔 수 없이 경직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무의식중에 오른쪽 팔걸이에 팔을 올리다 옆 사람과 부딪혔다고 해보자. 고개를 돌려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게 예의다. 하지만 이 ‘예의’는 뒤의 관객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다. 연주 내내 고정되어 있는 물체(뒤통수)가 움직이니 갑작스레 집중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깐의 여유가 주어졌을 때 앉아서 풀 수 있는 모든 기관을 움직여보는 것이고, 여기에 기침도 포함된다.
그 밖에 기침이 침묵에 대응하는 방식이라는 설도 있다. 악장 사이의 박수가 금지되면 자연스레 침묵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모든 게 바삐 돌아가고 온갖 소음에 자연스레 노출된 현대인은 이 침묵을 매우 긴 시간으로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침묵의 어색함을 메우기 위해, 침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필요한 헛기침을 한다는 것이다. 침묵에 대응하는 이러한 자세를 이용한 작품이 존 케이지의 ‘4분 33초’다.
‘헛’한 기침 대신 ‘핫’한 박수를 보내볼까?
간혹 합창석에서 공연을 볼 때가 있다. 지휘자의 표정이 보이는 그곳에서 청중의 기침 소리에 당황하는 외국 지휘자의 표정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런 경우 지휘자마다 대처하는 유형도 여러 가지다. 기침의 파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망부석형, 무시하고 돌진하는 질주형, 단원들과 웃으며 자신도 기침을 뽑아내는 공감형 등. 1770년대 이탈리아 성당에서는 연주가 끝난 뒤 회중이 박수 대신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기침을 하거나 코를 풀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기침이나 박수는 인체가 빚어내는 일종의 소음이다. 하지만 두 개가 지닌 의미는 다르다. 박수는 음악을 감상하는 동안 차곡차곡 쌓아둔 감동을 한꺼번에 분출하는 행위다. 그리고 기침보다 통제가 더 쉽다. 그래서 악장 사이에 박수가 튀어나오더라도 주위의 눈초리로 쉽게 제어할 수 있다.
흔히 악장 사이의 박수가 음악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한다. 하지만 음악평론가 이장직은 그의 논문 ‘악장(樂章) 사이의 박수에 관한 연구’(2011)에서 여러 연주자의 의견과 인터뷰를 근거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들려준다.
(1)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부소니(1866~1924)는 1897년 런던에서 ‘헥사메론 변주곡’을 연주할 때 각 변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에 대해 흐뭇한 반응을 보였다.
(2)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1887~1982)은 1966년 한 인터뷰에서 악장 사이의 박수에 대해 교양 없는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야만적인 짓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선 인터뷰어에게 “당신은 [악장 간의 박수를] 하지 않으리라 믿어요. (···) 하지만 난 [악장 간의 박수를]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1973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17세 때 파리에서 연 독주회 얘기를 들려준다. “1904년 프랑스 관객은 오늘날과 달랐다. 당시엔 잘 연주한 부분이 있으면 한참 연주 중인데도 박수가 터져 나오곤 했다. 사람들은 ‘브라보!’ ‘멋져요’ ‘대단해!’를 외쳤다. 소나타를 연주하다가 박수에 보답하기 위해 악장 사이마다 일어나 인사를 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것을 전혀 방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사람들의 환호가 내게는 힘이 되었다.”
(3) 피아니스트 이매뉴얼 액스(1949~)는 1악장이 끝난 다음 악장 간의 박수가 안 나오고 어색한 침묵만 흐르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고 말한다. “음악회장에 가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1악장이 끝난 뒤 다섯 명이 헛기침을 해댄다. 하지만 그것은 훌륭한 행동으로 여긴다. 나에겐 그게 도대체 말이 안 된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면 무조건 멍청한 청중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정말 어이가 없는 짓이다.”
음악회장의 불청객인 휴대폰 벨소리를 악기의 일부로 편입해 만든 협주곡도 있다. 이런 선례를 볼 때 언젠가는 ‘청중의 기침을 위한 협주곡’이 곧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안다 박수’가 문제라면 ‘나 몰라라 기침’도 문제가 되고 있다.
쓸데없이 쥐어짜는 헛기침 대신 그 자리에 악장 간의 박수가 들어선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기침이 더 크게 나온다면 박수를 더 크게 치고, 그런 박수는 연주자와 음악회장을 흥을 돋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훌륭한 연주여야 악장 간의 박수도 의미 있을 것이다. 앞의 주장들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금기시하는 악장 간의 박수는 판소리를 할 때 소리꾼을 향해 ‘얼씨구!’ ‘잘한다!’라고 외치는 추임새와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