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합창의 시즌이 돌아왔다. 인류의 화합을 꿈꾸는 베토벤 ‘합창’과 헨델의 ‘메시아’를 비롯해 미성과 천진함으로 웃음을 주는 소년합창단까지. 합창과 함께하는 연말은 언제나 따뜻하다. 많은 합창단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때, 관립합창단과 민간합창단의 맏형 격인 국립합창단과 서울모테트합창단을 이끄는 두 사람을 만났다. 30여 년간 한국 합창계에 몸담으며 그 역사를 지켜본 구천과 박치용. 두 지휘자가 우리나라 합창의 현주소와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바야흐로 합창의 시즌입니다. 특히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요. ‘합창’이 연말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천 베토벤의 ‘합창’은 음악의 구조상으로는 독창·합창·관현악이 한데 모인 종합무대이고, 내용 면으로는 사람과 사람의 신뢰·우정·희망 등의 내용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연말에 종합적인 무대를 상상해요. 구조와 내용 모두 그 상상과 맞아떨어지기 때문 아닐까요.
박치용 베토벤 ‘합창’은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음악 자체에도 메시지가 있지만, 베토벤의 인생 자체가 상황에 순응하기보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신분을 극복하려 했던 의지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음악적으로도 이렇게 완성도 있는 작품은 드물어요.
개인의 성격이 다 다르듯 단원들의 목소리도 천차만별인데, 어떻게 그 다양한 소리를 하나의 색으로 만드나요.
구천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은 감정이 서로 통해야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생각과 감정이 같으면 같은 소리가 나죠. 단원들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게 지휘자의 몫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휘자는 마음이 순수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순수한 상태로 전달해야 단원들도 이를 같이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
박치용 스위스의 한 심리학자는 두 사람이 마주보는 것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서야 하나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함께 바라볼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단원을 뽑을 때 ‘태도’와 ‘열정’ 이 두 가지를 봅니다.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인생 최우선 가치를 음악으로 놓고 있느냐, 이 두 가지만 확실하면 소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문제없어요. 스스로 음악에 대해 고민하고 올바른 방향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니, 지휘자와 같은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죠.
때로는 같은 방향, 같은 소리를 위해 조화를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해요.
박치용 소리의 조화는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유리해요. 언어의 음운 구조와 몸의 골격 등을 보면, 서양인들은 말을 할 때도 몸이 울립니다. 반면 동양인은 두성의 활용이 아직은 빈약하고 육성이 강하죠. 강한 육성을 극복하기 위해 지나치게 공명을 강조하고 목소리를 제어하기도 합니다. 화음은 깔끔하게 잘 나오니 합창적인 차원에서는 괜찮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성악적 면에서 충분히 음악적이냐를 따져봐야죠. 겉을 억지로 다듬어 만든 합창은 음악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훼손할 수 있어요.
구천 우리나라 직업합창단의 경우 단원 개개인의 기량이 굉장히 뛰어나요. 솔리스트와 견주어도 손색없습니다. 입단 경쟁률이 엄청나니까요. 개인 기량을 깎으면서까지 조화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합창관입니다. 성악적인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앙상블의 색깔을 찾는 것이 앞으로 우리 합창계가 나아갈 길이죠.
▲ 구천. 총신대 교회음악과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한양대 음악교육 석사를 졸업했다. 광주대에서 합창지휘로 박사학위를 받고 웨스트민스터합창대학에서 지휘법을 수학했다. 광주시립합창단·울산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를 거쳐 2014년부터 국립합창단의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한국 합창의 오늘을 짚어보다
현재 한국 직업합창단의 기량은 어느 정도인가요.
구천 우리나라에는 직업합창단이 60여 개 정도 있습니다. 그중 서른 개 정도는 세계적인 수준의 연주력을 갖추고 있어요. 흔히 예술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유럽과 미국의 지휘자들도 한국 합창단에게 적극적으로 프러포즈를 합니다. 앞으로는 창작 합창곡을 해외 합창단에서 연주하고 싶게끔 만들고 싶어요. 국립합창단 목표도 우리만의 창작곡을 발굴해 완벽히 연주하는 것입니다.
동시대 창작 합창곡은 국내에서 원활히 연주되고 있나요.
구천 아직은 과도기 같습니다. 가사는 한국어지만 흐름은 서양적인 곡이 많거든요.
박치용 요즘은 창작곡을 많이 연주하려는 분위기입니다. 현대합창곡은 쉽지 않기 때문에 연습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해요. 곡은 연주 후에 감동이 오는 곡과 연주가 끝날 때까지 스트레스를 주는 곡으로 나뉘어요. 후자는 연주가 끝나면 바로 잊혀버리죠.
구천 그게 명곡과 범곡(凡曲)의 차이 같아요. 연주자와 청중이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곡이 있어요. 그게 명곡이죠. 반면 범곡은 수없이 나왔다가 사라집니다. 아직 작곡을 예술이 아닌 ‘학문’의 범주로 인지해서 공부하듯 그려놓은 곡이 많아요.
현대의 창작합창곡이 많아질수록 저작권에 대한 문제도 생길 것 같은데요.
구천 일본은 아마추어 합창단 활동이 굉장히 활발합니다. 아마추어 합창 콩쿠르만 봐도 각 도시에서 예선을 거쳐 2박 3일간 결선을 할 정도니까요. 그 수만 개의 합창단이 악보를 다 ‘사서’ 사용하죠. 그러니 곡이 한 번 성공하면 수만 번 팔리는 겁니다. 우리는 아직도 합창단끼리 악보를 빌려 쓰고 복사해 사용하는 현실이죠.
박치용 서울모테트합창단 창단 후 8년 정도는 악보를 사서 써야겠다는 엄두를 못 냈어요. 유럽 악보를 주문하면 저작권료가 150만원에서 500만원까지 하니 재정이 부족한 민간 단체에서는 구매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죠. 지금은 힘이 닿는 대로 악보를 사 써요. 아직 국가적으로 ‘지적 재산’에 대한 개념이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 곡은 작곡가의 정신적인 유산이에요.
연주자와 작품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청중입니다. 청중은 합창단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박치용 청중은 우리에겐 끊임없는 숙제입니다. 현재 클래식 음악 청중의 성향이 기악 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어요. 예를 들어 말러의 교향곡을 완전히 이해하고 듣기는 어렵지만, 청중은 나름대로 의미를 찾고 그 사운드를 즐깁니다. 합창은 친근감을 느끼는 만큼 심리적으로 편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은 대개 처음에는 낭만음악의 드라마틱한 요소에 심취하다가 바로크 음악과 가곡으로 옮겨오고, 결국 종교음악에 귀결합니다. 합창음악의 청중은 친근하게 접근하는 사람과 클래식 음악을 학구적으로 접근하려는 사람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레퍼토리 선정을 고민하게 돼요. 현대 작품도 하나, 낭만 작품도 하나 이렇게 고루 섞어야 합니다. 정기연주회 이외의 무대에서는 이해하기 쉬운 레퍼토리를 주로 연주해요.
구천 요즘의 청중은 가사 이해를 중요시해요. 예전에는 가사가 잘 안 들리더라도 음악을 즐겼다면, 지금은 작품의 가사 속 뜻을 이해하려고 하죠. 노래의 경우 한국어로 불러도 사실 완벽한 딕션을 전달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요즘은 소리를 크게 잘 내는 성악가보다 또렷하게 노래하는 성악가를 더 높이 평가해요. 이제는 합창도 번역 가사보다 원어로 부르는 편이고요. 청중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합창 문화도 바뀐 거죠.
▲ 박치용. 서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26세에 서울모테트합창단을 창단했다. 26년째 서울모테트합창단의 단장이자 지휘자로 활동 중이다. 현재 한국합창지휘자협회 이사와 한국음악대학합창연합회 이사를 겸하고 있다
청중과 가까워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가요.
박치용 서울모테트합창단은 연말마다 헨델의 ‘메시아’를 청중과 함께 부르는 ‘싱 어롱 메시아(다 함께 부르는 메시아)’를 공연합니다. 캐나다에서 열리는 동명의 공연에서 착안했어요. 연말이면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청중이 객석에서 함께 합창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도 청중과 함께 합창하는 공연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작했죠. 원래는 예술의전당 관객석 모두를 합창석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아직은 그게 안 돼서 1층만 합창석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한국 합창이 발전하기 위해 어떤 점이 뒷받침돼야 할까요. 두 분이 서로의 합창단에게 조언 부탁드립니다.
박치용 국립합창단은 단원이 50명인데, 소화하는 연주가 일 년에 최소 60여 개에 오페라도 4편 이상 참여합니다. 성악가에게는 너무 혹독한 일정이죠. 독일은 극장합창단과 오페라합창단이 따로 있고, 방송합창단도 있습니다. 보통 단원이 80명 정도지요. 르네상스 레퍼토리를 할 때는 편성을 줄이고, 공연마다 단원을 로테이션하여 목소리를 쉴 수 있게 해요. 한국은 국립합창단에서 대부분을 소화하니, 단원들이 육체적으로 힘들어 합니다. 노래가 즐거워야 하는데 어떤 땐 피곤이 쌓여 즐겁지 않은 거죠. 국가에서 국립합창단의 연주 일정을 효율적으로 분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구천 민간합창단의 경우는 재정적인 문제가 크겠지요. 대부분의 재정이 후원으로 이루어지니까요. 법인으로 등록했더라도 대부분 법인의 형태를 갖추기 위한 출연금조차 겨우 마련한 경우가 많아요. 서울모테트합창단도 작년에 재단법인이 됐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따를 거예요. 재단이기 때문에 여유가 있을 거라는 억측으로 오해를 사기도 하고요. 이 부분을 공론화해 국가의 재단 지원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죠. 서울모테트합창단은 민간합창단으로는 유일하게 26년간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대를 잇거나 오래가는 다른 민간합창단이 없어서 아쉬워요. 서울모테트합창단이 나서서 민간 활동 영역에 자리매김 했으니 이제 그 다음 세대를 잇는 합창단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가 된다’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속 가사처럼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 되는 모습을 꿈꾼다. 한 시간 반 남짓한 시간, 두 지휘자는 합창에 대해 끊임없이 논했다.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소리를 향한 그들의 마음에는 열정이 있었고, 한국 합창의 현실을 짚어내는 그들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두 합창단은 올해도 어김없이 연말을 밝힌다. 국립합창단이 연주하는 헨델 ‘메시아’는 단원 간의 조화를, 서울모테트합창단의 ‘싱 어롱 메시아’는 청중과의 하모니를, 그리고 두 합창단과 서울시향이 함께하는 베토벤 ‘합창’은 단체의 화합을 넘어 전 인류의 평화를 노래한다.
사진 심규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