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1 넬라 호즈베스에서 탄생
1873 안나 체르마코바와 결혼
1875 브람스와 만남
1878 슬라브 무곡 제1집 출판
1892 뉴욕 국립 음악원장 취임
1893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작곡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 작곡
1895 체코로 귀국
1904 프라하 자택에서 사망
드보르자크가 체코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알고 보면 오늘날 무대에 오르는 그의 작품들은 미국에 체류하던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작곡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 글을 통해 그가 평생 사랑하던 체코의 전원을 바라보며 작곡한 걸작들을 만나보길 바란다.
시골 소년, 음악가 되다
안토닌 드보르자크는 1841년 프라하에서 20Km 북쪽에 자리한 넬라호즈베스에서 여관과 푸줏간을 운영하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안토닌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12세 때 음악 교육을 위해 인근 도시인 즐로니체로 보냈으며, 드보르자크는 이곳에서 오르간과 비올라, 독일어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가업을 계승하기를 바랐지만, 즐로니체에서 드보르자크를 돌보았던 외삼촌이 재정적 후원을 자처하면서, 아버지 역시 아들의 음악 공부를 밀어주기로 결심한다. 드보르자크는 16세에 체코 최고의 음악교육 기관 중 하나인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호텔과 음식점에서 연주하던 카렐 콤자크 악단에서 비올라 연주자로 활동했다.
1862년 프라하에 국립극장이 발족되었다. (민족주의적인 염원을 담아 시민의 자발적 모금으로 탄생한 이 극장은 기존에 있던 건물에 상주했고, 훗날 전용 건물이 지어졌다) 국립극장 소속 오케스트라는 카렐 콤자크 악단의 멤버들이 주축을 이뤘는데, 자연스럽게 이 악단이 극장 오케스트라로 흡수되었다. 여기서 드보르자크는 비올라 수석으로 활동했다.
그의 작곡 활동은 음악학교에 입학한 1861년에 ‘작품 1’을 붙인 현악 4중주 1번이 완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실력이 아직 부족함에도 독일 낭만의 거장들을 모범으로 하여 상당한 길이의 대작을 이 시기에 많이 남겼다. 현악 4중주 3번(1870)은 한 시간을 가뿐히 넘길 정도다. 국립극장 오케스트라 시절이던 1865년에는 첫 교향곡도 완성했다. 이 작품에는 ‘즐로니체의 종’이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종소리라고 할 만한 소리는 딱히 묘사되지 않고 있어서 학창 시절의 추억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1866년에 국립극장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나의 조국’의 작곡가인 스메타나가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체코어 오페라가 상연되기 시작하자, 드보르자크도 오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무대에 오른 그의 첫 오페라는 두 번째 작품 ‘왕과 숯 굽는 사람’의 개정판(1874)으로, 초연에서 호평받았다. 이후 드보르자크는 오페라를 천직으로 여기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오페라 작곡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업 작곡가로의 용감한 선택
그의 초기 작품들은 민족주의의 불길을 타고 주목을 받았다. 드보르자크는 전업 작곡가로서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1871년에 관현악단을 그만두었으며, 각고의 노력 끝에 1873년 비로소 신진 작곡가로 자리를 잡았다. 그 수훈작은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백산의 후계자들(1872)’로, 1620년에 보헤미아 귀족들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대를 무찌른 백산 전투를 소재로 하는 애국적 칸타타였다. 1873년 초연 무대가 호평을 받으면서 작곡가로서 앞길에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전망일 뿐, 당장 호구지책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해에 결혼식을 올린 드보르자크는 가장의 책임도 져야 했다. 그렇기에 성급했던 결정을 뒤로하고 1874년에 프라하의 성 아달베르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자리를 얻었다.
사실 교회 오르가니스트 자리는 일반적인 음악가들에게는 선망의 자리였을지 모르지만, 드보르자크는 겨우 2년 만에 교회 오르간 연주자를 그만두었다. 1875년에 오스트리아 정부가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기 때문인데, 400 굴덴(옛날 금이나 은 화폐의 이름)이라는 금액은 당시 드보르자크가 일 년 동안 벌던 돈의 두 배가 넘는 거금이었다! 이 장학금은 재능은 있지만 형편이 좋지 못한 작곡가를 지원한다는 취지가 있었는데, 드보르자크는 재정적 어려움과 함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재능’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았다. 매년 심사를 거쳐 선정된 음악가에게 5년간 장학금을 지원해준 덕에 드보르자크는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심사위원이던 음악학자 한슬리크와 작곡가 브람스와 평생 친분을 갖게 된 것은 이 장학금의 진정한 수혜였다. 특히 브람스는 4년 차 장학금 신청을 위해 드보르자크가 보낸 ‘모라비아 2중창(1876)’에 감동하여 장학금 수혜자로 선정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던 베를린의 음악 출판사 짐로크에 드보르자크를 소개해주었다. 이 일로 브람스와 드보르자크의 끈끈한 우정이 시작되었고, 드보르자크의 음악에는 브람스에 대한 존경에서부터 우러나온 듯한 뉘앙스가 담겼다.
그런데 사실 드보르자크는 실질적으로 바그너파에 훨씬 가까웠다. 한슬리크는 이를 우려했으며, 훗날 R. 슈트라우스풍의 교향시에 대해 개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이런 드보르자크의 행보에도 브람스의 애정은 식을 줄 몰랐다. “드보르자크가 곁가지로 쓰는 악상이 내게 떠올라주기만 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주요 주제로 쓸 텐데”라며 그의 풍부한 악상을 부러워했으며, 첼로 협주곡 2번(1895)에 대해서는 “이처럼 훌륭한 첼로 협주곡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나는 못했을까? 알았더라면 이미 오래 전에 썼을 텐데!”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세계로 발돋움하다
짐로크는 드보르자크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피아노 연탄곡 ‘슬라브 춤곡 제1권(1878)’을 의뢰했다. 이 악보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이 사건은 드보르자크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당시 그의 작품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는데, 바이올린 협주곡(1880)도 그중 하나다. 전형적인 낭만음악으로서 고전적 스타일을 답습하고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범상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러한 연유로 뛰어난 음악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드보르자크가 유명해지자, 1882년에 한슬리크는 독일어 오페라를 쓸 것을 요청했고, 빈 궁정 오페라의 총감독인 호프만 남작도 1884년에 같은 제의를 했다. 브람스는 빈으로 오면 자비로 집을 마련해주겠다며 이주를 강권했다. 보장된 성공의 길임을 알고 있었지만, 드보르자크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체코에 머물렀다. 이 대목에서 그는 강성 민족주의자로 비치지만, 사실 민족주의자로서 정치적 행보를 보인 적은 거의 없다. 다만 자신의 명성이 체코의 정치와 사회의 민족주의적인 경향에 다소 빚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일어로 오페라를 쓰거나 빈으로의 이주를 섣불리 실행에 옮길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드보르자크는 교향시 ‘후스 교도 서곡(1883)’과 교향곡 7번(1885) 등 체코 작곡가의 모습을 여전히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40대 중엽부터 그는 국제적인 거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특히 1884년 이후 영국으로부터 아홉 차례나 초청을 받았으며 최고 대접을 받았다. 영국에서의 연주회가 전회 대성공을 기록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영국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위촉받아 교향곡 8번(1889)과 ‘진혼곡(1890)’을 작곡했다. 1886년 ‘슬라브 춤곡 제2권’이 완성되었을 때, 짐로크가 지불한 이 곡의 원고료가 불과 8년 전 제1권의 원고료보다 10배나 많다는 사실이 그동안 수직적으로 상승한 그의 인기와 명성(그리고 보기보다 뛰어난 협상력도!)을 대변한다.
괴상한 선생
드보르자크는 1891년에 프라하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그의 교수법은 좀 특이했다. 이론보다는 실제를 통한 습득을 중요시하여 매시간 과제를 내주었다. 학생 입장에서는 매우 고될 수밖에 없는데, 게다가 어제 칭찬한 것을 오늘 비판하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스승이었다. 중도 포기하는 학생이 속출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도 수크, 노바크 등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한 것을 보면 좋은 제자를 두는 복도 타고난 모양이다.
이 시기에 작곡된 곡 중에서는 ‘둠키 3중주’라고 알려진 피아노 3중주 4번(1891)이 있다. ‘둠키’는 슬라브 지역의 애가를 뜻하는 ‘둠카’의 복수형으로, 체코의 지역색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다. 둠카는 동경과 우수에 찬 어두운 면과 자유분방하고 힘찬 밝은 면의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여섯 악장에 둠카의 열광적인 기질과 명상적이고 내면적인 감정의 변화가 뚜렷하게 새겨 있다.
드보르자크는 이듬해인 1892년 가을에 뉴욕 국립 음악원의 원장 초빙을 받았다. 뉴욕 음악원이 제안한 연봉은 1만5000달러. 프라하 음악원에서 받는 연봉의 무려 25배나 되는 굉장한 금액이었다.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재직 기간은 2년 반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았다. 비소카의 전원 별장이 그리워 향수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사실 음악원을 운영하던 저넷 서버의 집안이 뉴욕 증시 붕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연봉을 재대로 지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높은 연봉으로 풍족한 삶을 살던 먼 타지에서 그의 대표작인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1893)’와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1893)’, 첼로 협주곡 2번(1895) 등이 줄줄이 탄생했다.
드보르자크는 1892년에 미국에 들어오면서 흑인영가에 대해 “미국 음악의 미래이며 미국적인 음악을 쓰는 데 기초가 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893년에 아이오와 주의 스필빌이라는 체코인 마을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중 우연히 들은 인디언 음악에 매료되었다. 그의 걸작들에 체코 음악과 함께 이 음악들, 즉 흑인 영가와 인디언 음악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간혹 기존 선율을 인용하기도 했지만, 체코의 민속적 선율을 쓸 때에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영가 혹은 인디언 음악 스타일로 선율을 창작했다.) 체코의 전원을 사랑하던 그의 이국적 정서와 대중지향적인 미국 문화의 이러한 화학작용이 오늘날 드보르자크를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높은 명성,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
체코로 돌아온 후에도 드보르자크의 명성은 여전했다. 이때 민속 시에 의한 바그너풍 (그리고 리스트에 대한 경외감을 담은) 교향시 다섯 곡을 연달아 작곡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말러는 이 교향시들에 큰 호감을 갖고, 그중 하나인 ‘영웅의 노래(1897)’를 빈에서 지휘했다.
체코 밖에서는 유난히 맥을 추지 못하던 오페라 분야에서도 ‘루살카(1900)’로 뒤늦게나마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체코의 설화를 소재로 하고 체코어로 부르는 오페라가 외국에서 인기를 얻기에는 애초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드보르자크는 피아노곡을 그리 많이 쓰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쓴 8곡의 ‘유모레스크(1894)’는 기억해둘 만하다. 특히 일곱 번째 곡의 첫 주제인 부점 리듬 선율은 누구나 알 정도로 매우 유명하며, 중간 부분에 대조되는 여유로운 선율이 등장하여 다양한 표정을 지닌다.
1901년에는 프라하 음악원에 원장으로 부임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원의원으로 추대되는 명예를 얻었다. 그는 작곡가로 출사표를 던진 이후 이렇다 할 슬럼프 없이 작품을 발표했고, 명성은 끊임없이 높아졌다. 그러나 거장의 지위를 한껏 누릴 나이, 62세에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의사들은 사인을 혈전증이라고 추정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생전에 작곡한 ‘레퀴엠’(1890)이 연주되었다.
드보르자크는 초기에 바그너 등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곧 스메타나와 브람스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미국에서는 대중적 감각이 돋보이는 음악을 선보였으며 말년에는 특이하게도 그의 우상이던 리스트와 바그너의 일면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때에도 체코 음악을 잊은 적이 없으며, 그만의 개성적인 음악세계의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드보르자크와 그의 음악이 세계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으며, 드보르자크가 닦은 그 길을 통해 체코의 후배 음악가들은 비로소 세계무대로 나오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