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MAGE TO BEETHOVEN_글 권하영 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
뮤지컬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에서 빚어낼 베토벤의 모습
1800년대 초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귀가 먹었을 무렵, 저잣거리에선 “힘내, 귀가 들리지 않는 음악가도 있는데.”라는 말이 회자했다. 당시 서른 살 즈음의 나이로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던 그는 한순간에 불운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사로잡힌 그는 유서를 작성하기에 이르지만, 그 앞에는 또 다른 길이 열리고 있었다. 실제 유서를 작성한 이후에 음악적으로 더욱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탄생했던 것. 위기를 극복한 악성(樂聖)으로 추앙받는 그이지만, 오늘날에도 수많은 예술가가 각자의 슬럼프를 극복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들은 생계 앞에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대중에게 외면당할까 두려워하며,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걷지 못하는 배우가 될지도 모른다는 절망에 빠진다. 결국 베토벤의 삶은 위기 속에서도 생의 의지를 놓지 않으려는 우리 모두의 삶과 맞닿아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에도 그의 음악이 변함없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과연 무엇이 꺼졌던 삶의 의지를 타오르게 했고 끊임없이 도전하게 했는지, 실제 베토벤의 삶 사이사이 빈 곳을 그를 향한 오마주로 채워 넣은 뮤지컬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의 연출가 추정화와 루드윅 역의 배우 이주광을 만났다.
작품은 귀가 들리지 않게 된 베토벤이 유서를 작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추정화 베토벤은 그동안 자신이 썼던 곡들을 두 명의 동생에게 나눠주고 인생을 정리하는 유서를 작성한다. 그러나 유서만 썼을 뿐 실제 자살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절망에 빠진 그가 어떻게 음악을 받아들이고, 다시 작곡을 하게 되었는지 충분한 고증을 바탕으로 우리만의 상상력을 더했다. 특히 극 초반부터 배우들이 강한 호흡을 가져갈 수 있도록 연출하는 것이 힘들었다. 한 인물이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괴로웠다는 사실에 배우가 먼저 설득되어야만 관객 또한 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주광 다행히도 그동안 연기했던 캐릭터들이 극 초반부터 터뜨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뮤지컬 ‘셜록홈즈’에서도 처음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채 오열하며 등장했다. 그래서 이러한 포인트가 낯설진 않지만, 후반에 그 고통이 음악으로 승화되는 것을 표현해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뮤지컬 ‘모차르트!’나 ‘라흐마니노프’와 같이 음악가의 삶을 그려낸 뮤지컬들과 비교했을 때, 이번 작품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주광 베토벤이라는 위대한 음악가를 다룬 작품이라면 대극장에서 오케스트라나 합창단과 함께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겠지만, 이번 작품은 소극장에서 피아노 한 대와 함께 공연한다. 베토벤의 음악적인 측면보다는 인간적인 측면에 집중했다. 우리가 들어왔던 웅장한 음악 뒤에 숨겨진 한 인간이 어떠한 괴로움을 겪었고,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를 이야기로 풀어가고자 한다.
추정화 앞선 작품들도 음악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에 이 점이 우리만의 독특한 이야기라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베토벤을 소재로 한 뮤지컬은 이제껏 없었다. 우리 또한 조카 카를과의 관계나 가상의 여성 마리와의 만남을 통해 베토벤의 생을 그려내고자 한다. 마리의 경우에는 베토벤이 유서를 쓴 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고민하던 중에 누군가를 만나서 마음이 변화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고, 혹여의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진보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여성으로, 충분히 당시의 베토벤과 교감했을 만한 인물이다.
1차 런 스루(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진행하는 연습)를 앞두고 있는 현재, 연습 과정은 어떠한가?
추정화 음악감독 허수현, 안무가 김병진과 나는 서로를 헐뜯으며 연습을 진행한다. 이것이 글이냐 음악이냐 할 정도다. 그러나 상처받지 않을 만큼 신뢰가 탄탄하다. 단순한 비방에서 끝나지 않고 다양한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모두가 힘을 합해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하면 자유롭게 오가는 의견에 대해 상처받을 필요가 없다. 창작진의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배우들도 끊임없이 개선점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환경이었기에 짧은 시간 안에 초연작을 올리는 것이 가능했다고 본다.
이주광 이번 작품에는 청년 베토벤과 베토벤의 조카였던 카를을 모두 연기하는 청년 역의 배우와 중·장년의 베토벤을 연기하는 루드윅 역의 배우가 등장한다. 내가 맡은 것은 루드윅 역할이다. 함께 연기하는 김주호·정의욱 배우는 나보다 연륜이 있을 뿐 아니라 실제 죽기 전 베토벤의 나이도 선배들과 더 가깝다. 그러나 무대는 마법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나만의 루드윅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연출한 뮤지컬 ‘스모크’나 ‘인터뷰’처럼 불편하고 어려운 작품을 통해 관객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던 것은 인물의 심리 묘사가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 역시 격한 심리 변화를 겪은 베토벤을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가 된다.
이주광 연출가님이 배우를 하셨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실연을 하면서 글을 쓰신다. 감정을 표현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하시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회를 뜨듯이’ 연기를 해달라고 하셨다. 나름 오랜 연기 생활을 해왔는데, 처음 들어보는 신선한 말이었다.
추정화 강하면서도 섬세한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다. 도끼로 무언가를 내려치면 한 번에 쓰러지지만, 사시미 칼로 회를 뜨면 생선은 자신의 살이 도려내어 지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스르르 살결이 떨어지지 않나. 이러한 장면을 생각하고서 대본을 열심히 쓰는데, 좋은 배우들을 만나면 굳이 글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섬세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설명적인 대본이 되어버려 글을 덜어내는데, 지금이 그러한 경우다.
이주광만이 표현할 수 있는 베토벤이 있다면?
이주광 신기하게도 베토벤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지휘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늘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자랐다. 그래서 지휘하는 부분을 연기할 때도 크게 어색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베토벤을 가슴으로 표현해낼 수 있었던 데는 나 또한 서른 살 무렵,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뮤지컬 ‘헤드윅’ 이후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영화나 드라마에도 캐스팅된 상황에서 장애 진단을 받았다. 더 이상 배우를 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 또한 베토벤처럼 생을 마감하려고 했다. 정상적인 역할을 소화하는 배우 중에서 걷지 못하는 배우는 없지 않은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사고 이후 점차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잃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것조차 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게 되더라. 그때부터 장애진단을 받았던 다리도 조금씩 낫기 시작했고, 춤까지 출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시 어느 순간부터 본인의 역경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음악가가 귀를 듣지 못한다는 것과 배우가 걷지 못한다는 것. 내 경험에 빗대어서 이주광만의 베토벤을 만들어낼 것을 조심스레 기대하고 있다.
베토벤의 삶을 그린 작품인 만큼 음악적인 특징도 궁금하다.
추정화 뮤지컬 ‘인터뷰’에서부터 함께 한 피아니스트 강수영이 참여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연주자뿐 아니라 극 중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 정확한 배역의 이름도 있는데, 그의 정체는 공연에서 확인하는 작은 재미로 남겨두겠다(웃음). 풋사과 같은 연주자의 느낌을 소화할 배우가 필요했고, 베토벤은 그를 보면서 마침내 다 이루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역할에는 강수영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이주광 대중적으로 알려진 베토벤 음악의 빛깔에 허수현 음악감독님의 색깔을 더한 곡들이 작품에 등장한다. 같은 음악가로서 한참을 앞서 살다 가신 선배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곡을 쓰고 있다고 하셨는데,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만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이번 작품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추정화 뮤지컬 ‘인터뷰’는 도쿄를 거쳐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고, 얼마 전에는 상해에서 쇼케이스를 했다. 뮤지컬 ‘스모크’ 역시 도쿄 소극장에서 일본 프로덕션으로 공연하는 것을 보고 왔다. 올해 DIMF에서 쇼케이스로 선보였던 ‘블루 레인’과 초연작인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 역시 많은 이들이 다시 찾는 작품이 되면 좋겠다. 초연이나 쇼케이스를 준비할 때 배우와 스태프는 힘든 연습·공연 기간에 비해 턱없이 적은 돈을 받는다. 그 과정을 다 견뎌준 이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한 번 더 공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주광 트랜스젠더(뮤지컬 ‘헤드윅’)·외국인 노동자(뮤지컬 ‘빨래’)·카스트라토(뮤지컬 ‘파리넬리’) 등 다양한 역할을 연기해왔지만,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내가 죽은 이후에도 영원히 박수받을 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가 얼마만큼 이들을 왜곡하지 않고 표현해낼 수 있을까 두렵다. 이번에도 대본을 외우는 것보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어보고, 관련된 서적을 찾아보며, 당대 음악 양식은 어떠했는지 등을 공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전문가들이 봐도 ‘그래, 저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할 만한 정도가 되어야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가 누구냐는 마지막 질문에 돌아온 답은 역시 베토벤이었다. 배우 이주광은 미래지향적인 음악을 했던 베토벤을 존경할 뿐 아니라 원하는 것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성격이 본인과 닮아있다고 했다. 연출가 추정화는 아티스트로서의 베토벤이 품었던 신념을 닮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만든 것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베토벤은 큰 성공을 거둔 교향곡 9번 ‘합창’ 이후의 현악 4중주 ‘대푸가’가 큰 실패를 거두었을 때 담담한 반응을 보이고서 곡을 여러 번 수정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만들어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모습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정진하고 있을 어느 예술가들의 모습일 것만 같다.
뮤지컬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
11월 27일~2019년 1월 27일 JTN아트홀 1관
루드윅(김주호·정의욱·이주광)/청년(강찬·김현진·박준휘)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