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INTERVIEW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은 콘서트 마스터(Concert Master)로 불린다. 이탈리아에서는 Spalla d’ orchestra, 즉 오케스트라의 어깨라는 표현을 쓴다. 이름에서부터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지는 이 직책은 항상 바이올린 연주자가 맡는다. 바로크 시대에는 음악 전체에 화성을 잡아주는 하프시코드 연주자가 중요한 리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하프시코드는 두 손을 모두 사용하는 악기이기 때문에 디렉션을 단원들에게 전달하는 데 한계가 많았다. 17세기 말 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였던 코렐리는 자신의 곡을 연주하기 위해 맨 앞에 앉아 바이올린을 켜며 곡 전체를 이끌어 갔다. 그는 활을 지휘봉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하프시코드 연주자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리더가 바뀌었다. 18세기부터는 리더 역할을 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연주 실력뿐 아니라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도 요구됐다. 이후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복잡한 곡들이 많이 작곡되면서 지휘자가 생겨났고, 바이올린 연주자와 역할을 나눠 갖게 됐다. 이것이 오늘날 오케스트라 악장이 바이올린 연주자인 까닭이자 기원이다. 2018년,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의 악장과 제2악장으로 선발된 한국인 연주자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 4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 오디션에 최종 합격한 데 이어, 약 3개월의 수습 기간을 거쳐 11월에는 마침내 종신악장으로 임명된 바이올리니스트 박지윤이 첫 번째 주인공이다. 지난해 9월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원이 한국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스위스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제2악장으로 선발됐다. 파리고등음악원 선후배 사이인 둘은 지난 5월 부산에서 함께 공연을 펼치기도 한만큼 건강한 우정을 자랑했다. 이들이 전하는 파리와 취리히, 그곳의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소개한다.
친근하면서도 실력 있는 연주자와 악단 라디오 프랑스 필 악장 박지윤
박지윤이 말하는 라디오 프랑스 필은 현지인들에게 굉장히 친근한 오케스트라였다. 늘 라디오 생방송으로 중계되기 때문. 현대곡 초연도 많이 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느낌보다는 개방적인 분위기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모든 단원이 마치 실내악을 하듯이 긴밀하게 연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매력은 프랑스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 다들 악기에 자연스러운 ‘공기 반 소리 반’을 장착하는데, 이보다 프랑스 음악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현재 라디오 프랑스 필의 단원은 130명 정도이며, 두 달 전 제2바이올린 부수석 자리에 파리에서 공부한 이은주가 들어왔다. 특히 이곳은 지휘자 정명훈이 약 15년간 이끌던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이번 시즌 정명훈 선생님이 오셔서 3개의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선생님께서 지휘봉을 잡으면 마치 미지의 땅을 탐험하는 함선의 선장처럼 단원들을 이끄는데, 긴 시간 쌓인 신뢰로 단원들이 어떠한 의문이나 의심 없이 선생님을 믿고 따라간다는 느낌이었다.” 현재 라디오 프랑스 필을 이끄는 건 30대의 젊은 지휘자 미코 프랑크다. 많은 연주자가 그를 가리켜 대단히 열려 있는 사람이며 단원들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미코 프랑크가 추구하는 음악은 불필요한 장식들을 거둬낸 자연스러운 음악이다. 그리고 비팅이 정확해서 불확실함을 느낄 타이밍이 전혀 없다. 무대에 올랐을 때 단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하는데, 단연코 단원들의 최고 역량을 끌어내실 수 있는 분이다.” 현재 라디오 프랑스 필에는 입단 20년이 넘은 엘렌 콜레트가 박지윤과 함께 악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서울시향 객원악장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스베틀린 루세브가 얼마 전까지 악장으로 있기도 했다. “라디오 프랑스 필은 현 파트 보잉을 첫 리허설 한 달 전까지 악장이 정리해서 보내야 하는데, 이 일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웃음) 리허설 중간에 보잉을 바꾸는 것도 악장의 주도하에 이뤄진다. 가장 중요한 건 악장이 지휘자의 음악적 의도를 잘 파악해서 확신을 갖고 연주해야 함께하는 단원들이 믿고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지휘자 다음으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단원들이 악장을 보고 연주하는 경우도 많다.” 박지윤은 단원들과 음악감독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원래 계획이었던 수습 기간보다 빨리 종신악장으로 임명됐다.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내가 가진 최고의 모습들을 다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리허설이나 연주 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와 잠이 들고, 또 다음 연주를 준비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나 많은 단원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역량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특히 지방 국립오케스트라에서 7년 정도 악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종신악장으로 임명된 후, 어느덧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수습 기간 때와는 다르게 행동 하나하나가 더 이상 평가받지 않는다는 안도감과 함께, 나를 믿고 종신악장으로 임명해준 오케스트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잘해나가야겠다는 책임감을 함께 느낀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원과는 개인적으로 만나 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분이 깊었다. “재원이는 바이올린을 잘하는 것은 물론, 내가 그 나이였을 때보다 훨씬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하는 것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나가는 모습이 선배로서 아주 기특하다.” 바이올리스트이자 인간 박지윤은 최근 가족과 보내는 시간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연주 활동 이외의 나머지 시간에는 무조건 가족과 함께 보내려고 한다. 지난 1년간은 새로운 환경에서 일에 적응하느라 가족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 나만의 작은 목표는 일과 가정생활 간 건강한 균형을 찾는 것이다.” 박지윤은 오는 10월 샹젤리제 극장에서 비발디 협주곡 협연 무대를 갖고, 11월에는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의 작품을 협연한다. 내년 2월에는 한국에서 프렌치 레퍼토리로 독주회를, 8월에는 트리오 제이드 정기연주회로 만날 수 있다.
파보 예르비와 함께 빛날 당돌한 매력
취리히 톤할레 제2악장 김재원
김재원이 취리히 톤할레 제2악장으로 임명된 건 지난해 9월 오디션 당일이었다. 그녀는 오는 8월, 파보 예르비와 함께 본격 임기를 시작한다. 앞으로 10개월의 수습 기간을 거쳐 종신악장 여부를 결정한다. “만 25세라는 나이에 오케스트라에 취직하게 될 줄은 몰랐다. 파리고등음악원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있을 때, 라디오 프랑스 필의 부악장을 지내다 프랑스 릴 국립 오케스트라 악장이 된 아야코 타나카가 본인이 지냈던 부악장 자리를 추천했다. 이것이 첫 오케스트라 오디션이었다. 서류심사 이후 1차에 55명, 2차에 3명이 진출했고, 3차에는 혼자 올라갔다. 연주자의 순발력을 확인하고자 오케스트라 곡 중 까다로운 부분을 짧게 발췌하여 솔로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액섭(excerpts)을 연주해볼 기회가 많이 없었다 보니 파이널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래도 예상보다 좋았던 결과에 용기를 얻은 때, 취리히 톤할레 제2악장 공고가 떴다. 망설이지 않고 지원했다.” 취리히 톤할레 파이널을 회상하는 그녀는 아직도 떨림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여러 해 공석이었던 제2악장을 동양인 최초로 악장 3명의 몰표와 단원들의 투표로 얻게 됐다. “파이널 당시 전 단원이 콘서트홀에 모였다. 하나같이 인자하게 웃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깊은 배려가 느껴졌다. 무대를 끝내고서는 백스테이지에서 20분 정도 기다렸다. 이후 문이 열리며 무대로 걸어 나갔는데, 객석에 앉아있던 단원들이 모두 한 줄로 나와서 인사를 건넸다. 특히 악장 중 한 분인 줄리아 베커가 ‘우리 오케스트라에 시험 보러 와줘서 정말 고맙다’며 꼭 껴안아 주실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김재원이 취리히 톤할레에서 맡게 된 역할은 제2악장이다. 제2악장과 부악장의 차이가 궁금했다. 그녀는 제2악장을 제2바이올린 수석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나 또한 제2악장이란 단어가 생소했다. 부악장(Associate Concert Master)과 제2악장(Second Concert Master)은 영문 표기부터 다르다. 취리히 톤할레는 제2악장을 계약조건으로 내거는데, 80퍼센트는 부악장, 20퍼센트는 악장으로 활동하며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해야 한다. 보통 유럽 프로 오케스트라에서 부악장은 그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제2악장은 좀 더 확장된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김재원이 말하는 부악장 역할의 핵심은 오케스트라의 소리들이 섞여들도록 하는 것이었다. “악장은 확실한 신호를 줘서 리드하는 사람이라면, 부악장은 절대 악장의 선을 넘으면 안 된다. 그래서 부악장이 조금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소리를 절대 잃지 않는 것이다. 소리가 섞이도록 하는 작업은 정말 중요하나, 부악장만의 분명한 소리와 정확한 음정을 갖고 있어야 악장이 안심하고 연주할 수 있다. 또한 악장과 제2바이올린 수석 사이에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 너무 튀면 안 되고, 너무 소극적이어도 안 되는, 매우 정교한 자리라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는 오케스트라 제2악장을 위한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왔다. “정명훈 선생님이 이끄는 원 코리아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을 했다.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만큼 어려웠던 점은 악장으로서 강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선생님이 워낙 대가시라 모두가 그분의 사인을 보고 따라올 줄 알았는데, 악장이 나름의 사인을 정해서 단원들에게 보여줬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합격 발표가 나자마자 프랑스에도 빠르게 그녀의 소식이 전해졌다. 김재원은 현재 릴 국립 오케스트라 객원부악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릴 국립 오케스트라 지휘자로부터 나를 객원부악장으로 써보고 싶다고 직접 연락이 왔다. 지난 1월부터 말러 시리즈를 전곡 연주하고 있다. 특히 말러는 부악장 솔로가 있는 심포니들이 많다 보니, 부악장으로서 어떤 소리를 내야하는지를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다.” 오케스트라 오디션을 준비하며 고민에 빠졌던 그는 파리고등음악원 선배인 박지윤에게 전화를 걸어 액섭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라디오 프랑스 필 부악장 시험을 준비할 때 언니에게 처음 연락했다. 같은 교수님 제자기도 했다. 흔쾌히 도와준다고 해서 2번 정도 언니네 집을 찾아가 액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왕래가 잦아지면서 얼마 전 부산에서 함께 공연도 했다. 프랑스 최고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맡고 있지만, 언니에게서는 위계의식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털털하고 성격 좋은, 오래 알고 지낸 언니 같다.” 김재원은 오는 7월 프랑스 실내악 페스티벌에 3년 연속 초청되어 공연한다. 8월에는 프랑스 지베르니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8월 말부터는 본격적인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활동을 시작한다. 그녀의 목표는 꽤 자연스러웠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을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이 김재원이 이루고자 하는 바였다. “지금도 목표가 종신악장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준비를 잘해서 단원들의 신뢰를 얻으면 종신악장이란 결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합격 통보를 받고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엄마, 나 이런 분들과 같이 일하게 됐어. 나 얼마나 더 배우게 될까?’라고 했다. 평생 배워나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글 권하영 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