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STAGE
배우 진지희
제 비극을 팝니다, 장례비만 주신다면!
한국 초연 연극 ‘내 엄마의 장례식: 더 쇼’의 90분을 채우는 진지희의 새 도전

봄기운이 완연한 4월 초, 대학로의 한 연습실을 찾았다. 연습 시작 전부터 동선을 맞추고 움직임을 반복하며 분주하게 장면을 이어가는 배우들의 모습에서 초연을 앞둔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졌다. 그 중심에는 대본이 담긴 아이패드를 손에 꼭 쥔 채 대사를 곱씹는 진지희가 있었다.
대중에게 배우 진지희는 친숙한 이름이다. 어린 시절부터 카메라 앞에서 성장해온 그는, 이제 익숙한 프레임을 벗어나 관객과 직접 호흡하는 연극 무대에 서고 있다. ‘갈매기’(2022) ‘시련’(2025) ‘노인의 꿈’(2026)을 거치며 차근차근 무대 문법을 익혀온 그가 이번에 선택한 장르는 블랙코미디다.
진지희는 연극 ‘내 엄마의 장례식: 더 쇼’(작 켈리 존스, 연출 박현철·박수이)에서 엄마의 장례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비극을 연극으로 팔아야 하는 딸 애비게일로 분해 관객과 마주한다. 작품은 가족의 상처와 사랑, 존엄, 그리고 돈이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다.
카메라 앞에서의 필모그래피를 잠시 내려놓고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그의 모습은, 무대 위 애비게일이 펼치는 치열한 고군분투와 자연스레 겹쳐 보였다.
애비게일의 MBTI를 정의한다면 무엇일까요?
요즘은 온통 애비게일 생각뿐이에요. 에너지를 온전히 쏟아부어야 하는 시기라 그런지, 오늘도 전막 연습(런)을 도는 꿈을 꿨어요. 잠을 자고 일어난 건지, 무대 위에서 런을 한 번 더 돌고 온 건지 헷갈릴 정도죠.(웃음) 애비게일은 현실적이고 이성적이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애쓰는 아이예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뭐든 시켜만 달라”고 말할 만큼 생활력이 강하죠. 그래서 저는 애비게일의 MBTI가 ‘INTJ’일 것 같아요.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니까 ‘N’, 이성적인 ‘T’, 그리고 계획적인 성향의 ‘J’ 아닐까요?
한국 초연인 만큼 ‘첫 번째 애비게일’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무게도 상당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걱정이 60%였어요. 대본이 정말 잘 읽혔고 메시지도 좋았지만, 90분 내내 퇴장 없이 극을 끌고 가야 하는 만큼 대사량이 엄청났거든요. 하지만 평소 꼭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었던 선배님들이 계셨고, 3인극의 주인공으로서 무대를 꽉 채워보고 싶다는 욕심도 났어요. 무엇보다 “기회가 주어질 때 망설이지 말자”가 요즘 제 인생의 모토라 용기를 냈습니다.
엄마의 장례식을 ‘연극’으로 만든다는 설정이 꽤 파격적인데요. 대본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 소재로 삼아 장례비를 마련한다는 설정부터가 무척 신선했어요. 영국 배경이라 한국과는 장례 문화가 조금 다르지만, 애비게일이 환상 속 엄마와 현실의 오빠, 그리고 연극을 준비하며 연출가와 배우를 차례로 마주하는 서사 구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이성적인 ‘작가’와 감정적인 ‘딸’ 사이를 오가는 연기가 쉽지 않을 텐데, 가장 애정이 가는 장면이 있다면요?
작가로서 냉철하게 글을 쓰다가도, 환상 속에서 엄마를 마주하는 순간, 순식간에 딸로 돌아오는 찰나의 간극이 있어요. 그 모습을 보며 ‘아, 이 아이도 결국 살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숨통을 트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그 지점이 참 아프고 애정이 갑니다.
죽음이나 이별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게 되었을 것 같아요.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어요. 꼭 비싼 관을 사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만이 좋은 이별일까 싶더라고요.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그 사람을 어떻게 잘 보내주고, 남겨진 내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됐죠.
웃음 뒤에 남겨질 묵직한 질문
LG아트센터(U+스테이지)의 4면 무대에서 90분 내내 퇴장 없이 극을 끌고 가는 것도 큰 도전이겠어요.
맞아요. 전면만 응시하는 프로시니엄 무대가 아니기에 관객이 뒤쪽과 양옆에도 계시거든요. 모든 방향을 인지하며 연기해야 하죠. 뒤편에 계신 분들에게도 소리가 아닌 제 에너지가 온전히 전달되어야 해서 요즘 발성 레슨을 다시 받고 있어요. 음역을 넓히고 감정 표현을 위해 다양한 소리를 내보려고 부단히 연습 중입니다.
카메라 앞과는 다른, 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은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카메라 앞이 익숙했던 터라, 처음에는 객석의 수백 개 눈동자가 저를 향하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기운이 느껴져야 더 몰두하게 돼요. TV는 관객의 표정을 즉각 확인할 수 없지만, 무대는 실시간으로 반응이 오니까요. 무엇보다 ‘첫 공연’부터 ‘마지막 공연’까지 캐릭터가 점차 달라지는 과정이 정말 재밌어요. 캐릭터와 제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가는 그 과정이 연극의 진짜 맛인 것 같아요. 무대에서는 다시 신인의 자세로 돌아가 선배님들께 하나부터 열까지 여쭤보며 배우고 있습니다.
연습 시간 외에 무대 문법을 익히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있나요?
다양한 연극 작품을 챙겨 보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최근에는 정웅인 선배님이 출연하신 극공작소 마방진의 ‘리어왕외전’을 관람했는데, 마이크 활용법이나 관객과 주고받는 에너지 등 배우로서 배울 점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만약 지희 씨에게 사생활을 연극으로 만들면 제작비를 주겠다는 제안이 온다면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주변 작가님들께 물으니 다들 본인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저도 제 사생활은 지키고 싶지만, 꼭 써야 한다면 동화로 만들래요. 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되 각색을 많이 가미해서, 실제의 저와는 조금 거리감을 두고 싶거든요.
마지막으로 관객들이 이 ‘쇼’를 어떻게 즐겨주길 바라나요?
내향형(I)인 분들도 공연장에서만큼은 외향형(E)이 되어 마음껏 호응하며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작품은 관객과 함께 완성하는 쇼니까요. 일상을 콘텐츠로 소비하는 시대에 존엄성을 묻는 이 이야기가 깊은 여운을 남길 거라 생각해요. 웃으며 즐기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나를 돌아보게 되는, 그런 작품이 되길 바랍니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수컴퍼니
진지희(1999~) 2003년 드라마 ‘노란 손수건’으로 데뷔했다. 2009년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MBC 방송연예대상 아역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연기 활동을 이어왔다. 최근에는 ‘갈매기’ ‘시련’ ‘노인의 꿈’ 등 연극 무대에 오르고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연극 ‘내 엄마의 장례식: 더 쇼’
4월 11일~5월 10일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켈리 존스(극본), 박현철·박수이(연출), 김수아(번역), 여신동(무대·조명디자인)/한재아·진지희(애비게일 월러), 이정미·이경성(엄마·배우), 이형훈·송석근(대런 월러·연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