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 | 내 삶을 정화한 조각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6월 1일 12:32 오전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28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김현미

내 삶을 정화한 조각들

 

 

김현미 미국 메네스 음대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부천시립교향악단 악장, 가천대 음대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콰르텟 21 멤버 및 코리아나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 음악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 01

음악의 철학을발견한 순간

#쇤베르크 #‘정화된 밤’ Op.4 #인생을 바꾼 경이로운 음악

감상 포인트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철학적 광휘

 

음악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대신 이야기해 줍니다. 한 음 한 음이 마음의 결을 따라 흐를 때, 우리는 잊고 지냈던 내면의 울림과 마주하게 됩니다. 기쁨과 슬픔, 죄와 용서라는 상반된 감정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그 작은 떨림은 때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경이로운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의 ‘정화된 밤’이 그러했습니다. 수년 전, 미국 말보로 페스티벌에서 이 곡을 처음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여전히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젊은 연주자였던 저에게 쇤베르크의 선율과 현악 6중주의 짙은 울림은 감각의 경계를 넘어 영혼의 내밀한 곳을 파고들었습니다.

리하르트 데멜(1863~1920)의 시 ‘두 사람’을 바탕으로 한 이 곡은 달빛 아래 숲길을 걷는 남녀의 갈등과 화해를 그립니다. 후기 낭만주의의 탐미적 정점에서 조성의 틀을 깨트리며 나아가는 유기적인 흐름은 우리 삶의 복잡미묘한 감정선과 닮아 있습니다. 작업을 이어가는 동안 저는 이 작품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나 소리의 조합이 아닌, 시적 서사를 넘어선 고도의 철학적 내용임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이 고귀한 희생을 통해 어떻게 ‘정화’될 수 있는지, 어둠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 빛이 되어 타인을 비출 수 있는지, 쇤베르크는 그만의 독창적인 언어로 새롭게 빚어내고 있었습니다.

최근 코리아나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의 음악감독으로서 동료들과 다시 이 곡을 무대에 올리며, 과거 말보로 음악 페스티벌에서 느꼈던 처음의 경이로움을 다시금 소환했습니다. 음과 음 사이의 숨결, 연주자들의 미세한 감정선까지 나누는 과정은 기술적 완성을 넘어선 음표 너머의 마음이 서로에게 닿는 깊은 공감의 시간이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해 흐르는 이 위대한 선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속삭입니다. 아무리 짙은 어둠 속이라도 진심어린 용서와 사랑이 있다면, 그 밤은 반드시 찬란한 새벽으로 정화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 02

시공간을 초월한 감동

#‘헛소동’ 모음곡 Op.11 중 ‘네 개의 소품’ #코른골트 #예술적 확신을 가져다준 곡

조지 셀/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협연 레온 플라이셔)

감상 포인트 시간을 통과해 빛나는 선율, 선명하게 그려지는 인물과 장면, 익살스러운 리듬과 낭만적인 선율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1897~1957)는 20세기 음악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곡가입니다. 흔히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음악적 본질은 유럽 정통 클래식 음악의 심오한 토양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로부터 ‘음악적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고, R. 슈트라우스가 경탄했던 그는, 영화계로 진입하기 전부터 이미 자신만의 완숙한 음악 언어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영화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평생 축적해 온 클래식 음악의 정수를 스크린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확장해 나간 거침없는 예술적 행보였습니다.

저는 본래 코른골트 특유의 창의적인 작곡 기법과 바이올린의 다채로운 색채감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그의 독창성에 깊이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하게 된 그의 작품 ‘헛소동’은 저에게 강렬한 끌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극을 바탕으로 한 이 곡은 본래 연극 부수음악으로 탄생했으나, 이후 작곡가 본인이 직접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네 개의 소품’으로 편곡하며 악기 고유의 매력을 극대화한 걸작입니다. 연주를 위해 작품을 연습하고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저는 이 곡이 지닌 변화무쌍한 색채에 더욱 깊이 매혹되었고, 그 예술적 확신은 저의 시리즈 음반 네 장 중 첫 번째 음반인 ‘인스퍼레이션’에 이 작품을 수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코른골트의 선율이 시공간을 넘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지켜낸 음악적 본질 덕분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그의 음표가 되고, 다시 연주자의 호흡으로 살아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고귀한 음악적 유산의 재발견입니다. 이 곡이 그려내는 찬란한 풍경이 감상자들에게도 시공간을 초월한 감동으로 전해지길 바랍니다.

 

 

# 03

제자와 함께 꺼낸기념품

#폴 쇤필드 #‘네 개의 기념품’#작곡가와의 인연을 이어준 음악

감상 포인트 현대의 위트와 추억의 변주, 화려하고 정열적인 리듬, 20세기 초 미국 대중음악의 빈티지한 감성

 

 

음악은 때로 작곡가와 연주자를 시공간을 초월한 깊은 유대로 연결해 줍니다. 저에게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폴 쇤필드(1947~2024)의 ‘네 개의 기념품’은 바로 그러한 특별한 인연의 기록입니다. 2016년경 우연히 이 곡을 발견했을 때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클래식 음악의 엄격함 속에 탱고, 삼바 등 대중적인 리듬을 세련되게 녹여낸 그의 감각적인 어법에 단숨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독주회에서 이 작품을 선보인 후, 가시지 않는 매력에 이끌려 2018년 음원 녹음을 진행했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2024년 작고한 쇤필드와 직접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 인생의 값진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보낸 음원에 대해 그는 해석과 세밀한 표현에 관한 소중한 조언을 해주었고, 이는 제가 이 작곡가와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으나, 당시 이 작품에 느꼈던 깊은 흥미와 애정 때문에 그의 한국 방문을 직접 추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보관되어 있던 음원은 긴 시간을 지나 2026년 2월, 저의 실내악 음반 ‘울림의 잔상’에 담기게 되었습니다.

이 곡의 에너지는 저뿐만 아니라 저의 제자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저와 함께 이 곡에 심취했던 여러 제자가 크고 작은 무대에서 이 작품을 연주했고, 그들과 함께 이 곡을 만들어가던 밀도 높고도 흥미로웠던 과정은 이제 저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쇤필드의 음악은 난해한 담론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기념품’처럼 꺼내어 보여줍니다. 작곡가와의 뜨거운 소통, 제자들과의 열정,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이 음반이 청중들에게 현대음악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유희와 따뜻한 추억으로 닿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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