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①

세상을 살아갔던 한 예술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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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1월 16일 8:03 오전

 

우리에게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어떠한 의미일까? 그가 울고 웃었던 그의 나라 소련은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정보일까? 아마도 이 글을 읽고 난 독자는 이 질문에 대해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그가 겪은 과거의 고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누군가는 그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통해 그 신음을 듣는 귀를 열게 될 것이며, 그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시작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에서 폴란드 이민 3세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볼레스와프 쇼스타코비치는 1863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1월 봉기’ 이후 시베리아로 이주했고, 아버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한 재원으로서 근대적인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화학자 멘델레예프의 연구팀에서 일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어려움 없이 성장한 쇼스타코비치는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 밑에서 일찍부터 음악을 접했다.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에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14년에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이 바뀐다. 1924년 레닌그라드로 다시 한번 이름이 바뀌고, 본래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은 것은 1991년이 되어서였다)에 입학했다.
쇼스타코비치에게 작곡가로서의 성공은 빨리 찾아왔다. 19세 때인 1925년에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완성한 교향곡 1번이 니콜라이 말코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연주로 큰 찬사를 받은 것이다. 이전 쇼팽 콩쿠르에 참여했을 때 만났던 적이 있는 브루노 발터 역시 이 곡에 큰 흥미를 느끼고 베를린에서 연주했으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도 필라델피아에서 이 곡을 연주하고 음반까지 발매했다. 그의 이름이 순식간에 유럽을 거쳐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후 교향곡 2번 ‘10월’(1927)과 교향곡 3번 ‘5월 1일’(1929)은 소비에트 혁명 정신에 부합하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수십 회 공연되며 큰 인기를 얻었다.

명성, 혼란을 야기하다 
하지만 소련에서 대중에게 인기가 높다는 것은 곧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단 통치자보다 더 많은 이목이 쏠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명세를 얻으면 통치자에게 쉽게 노출되어 감시의 눈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통치자로부터 좋은 평을 받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 반대라면? 이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쇼스타코비치가 바로 그러한 위험에 직면했다. 1936년 1월 26일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참석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공연에 직접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즉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으로 달려가 스탈린이 관람하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하얗게 질렸다. 스탈린은 금관과 타악기가 큰 소리를 낼 때마다 부르르 떨었고, 주인공의 러브 신에서는 비웃기도 했다. 그리고 3막 도중에 나가버렸다! 이틀 후, 관제신문 ‘프라우다’에 실린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읽었다. “이것은 난해한 것들을 가지고 노는 장난이며, 몹시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프라우다’지의 익명 사설은 곧 통치자의 말이었으며, 공식적인 비판은 곧 파멸을 의미했다. 그리고 1주일 뒤에는 그의 발레 음악 ‘맑은 시내’에 대한 비판이 실렸다. 쇼스타코비치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는 작은 여행 가방을 챙겨두고 밤잠을 설치며 자신을 데리러 올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는 기적과 같이 살아남은 것이다. 이후 딸 갈리나가 태어났고, 그는 이제 가족을 지켜야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서구적인 음악 언어를 사용한 교향곡 4번을 완성하고 리허설까지 진행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결국 초연을 취소했다. 그리고 1937년에 새로운 교향곡 5번을 내놓았다. 자신의 아픔뿐 아니라 소리 없이 사라진 친구들을 기리는 것이 진의였지만, 겉으로는 소비에트 정부가 좋아할 만한 내용을 갖추었다. 다행히 정부는 작품을 좋게 해석했고,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영웅이 됐다.
1938년에 아들 막심이 태어났고, 1939년에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로 정식 임용되었다. 그리고 교향곡 6번의 초연은 비평가들의 의견이 갈리기는 했지만, 정부의 비판 없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일단의 위기는 지나간 듯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음의 평정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피폐해진 내면의 치유가 필요했다. 교향곡이 외향적인 메시지를 담았다면, 그는 내면과의 대화로서 현악 4중주를 택했다. 교향곡 5번 완성 직후 현악 4중주를 구상하여 1938년 7월에 1번을 완성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에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나는 천진난만하고 밝은, 봄과 같은 분위기로 어린 시절의 장면들을 그렸다.” 15분 남짓의 짧은 연주 시간 동안 곡에서는 다양한 표정이 감지된다. 평정과 불안, 그리고 꿈과 현실의 공존. 곧 쇼스타코비치의 마음이었다.

전쟁 속에서도 꽃피운 작품 
소련은 1930년대 말 독일과 혹독한 전쟁을 치렀다. 독일군 북부 전선이 레닌그라드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레닌그라드에 있었던 쇼스타코비치도 여느 젊은이들과 같이 징집되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시력도 좋지 않았던 그는 후방에서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소방수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소방수 모자를 쓴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 1942년 7월 20일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고, 이러한 그의 모습은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저항을 상징했다. 전 세계 대중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도 되었다. 이렇게 얻게 된 국외에서의 높은 인지도는 이후 쇼스타코비치가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부지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1941년에 조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작곡했다.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곡 중 가장 규모가 큰 곡 중 하나로, 나치의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훗날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은 사실 전쟁 전에 구상되었으며, 스탈린의 포악한 정치로 인한 희생자를 애도하는 곡’이라고 말했다. 이 곡은 마이크로필름 악보로 미국에 전해져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 교향악단에게 연주되었으며,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 연주의 녹음을 듣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1943년 여름에는 교향곡 8번이 완성되었다. 교향곡 7번이 전쟁에 대한 외면적인 혹은 공식적인 표현이었다면, 8번은 전쟁에 대한 슬픔과 희생자를 추모한 곡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정적들은 승리를 노래해야 할 때에 비극적인 작품을 작곡한 것을 두고 파시스트를 지지한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오히려 정부는 국민의 단합을 위해 이 곡에 ‘스탈린그라드’(현재 모스크바 남쪽 카스피해 부근의 볼고그라드를 지칭하던 말)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가장 치열하고 피해가 컸던 스탈린그라드 전쟁의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 곡이라고 두둔했다.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44년 2월, 친구였던 음악학자 이반 솔레르친스키가 세상을 떠났다. 쇼스타코비치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피아노 3중주 2번에 착수했다. 큰 슬픔으로 여러 차례 작곡을 잇지 못하던 그는 8월이 되어서야 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를 추모하는 또 다른 작품 현악 4중주 2번을 작곡했다. 이 두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요청으로 그해 11월 14일 솔레르친스키가 음악감독으로 있었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대공연장에서 베토벤 4중주단과 작곡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다.

소방수 모자를 쓴 쇼스타코비치, 1942년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쇼스타코비치

 

전쟁 후 찾아온 폭풍전야 
1945년, 전쟁이 끝났다. 승리에 도취한 국가적 분위기와는 달리 쇼스타코비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1943년 교향곡 8번의 혹평에 불안했던 그는 다음 작곡할 교향곡은 전쟁의 승리를 표현하는 애국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고 성급하게 발표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9번’이 갖는 상징성까지 더해져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다. “분명 베토벤 교향곡 9번에 필적하는 규모에, ‘레닌그라드’과 같이 영웅적인 곡이 탄생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정부가 전쟁 직후 국가 재건에 전력을 다할 것이고, 음악 따위는 신경 쓰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1945년 7월에 새로운 교향곡에 착수하여 불과 한 달 만에 교향곡 9번을 완성했고, 초연은 11월에 이루어졌다. 관객들은 어리둥절했다. 합창은커녕, 그의 교향곡 중 가장 작은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내용은 경쾌하고 유머로 가득했다. 승리를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생각보다 자신의 명성이 높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스탈린은 분노했고, 비평은 심각했다. 소련 음악계의 거목이었던 보리스 아사피에프는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비판했고, 평론가 이스라엘 네스티에프는 이러한 곡을 내놓기에 적절한 시점인가에 대해 반문했다. 심지어 ‘뉴욕 월드 텔레그램’지도 “나치에 대한 본인의 감정을 그렇게 유치한 방법으로 표현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썼다.
그런데 그의 신상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음악원에서 가르치는 것도, 가족에 대한 특전도 그대로였다. 이듬해 8월에 현악 4중주 3번이 완성되었고, 11월 14일 베토벤 4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악장은 교향곡 9번의 연장으로 보였지만, 전체가 5악장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나 추모의 성격이 짙은 다른 네 악장의 내용으로 보아 교향곡 8번의 여운이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는 곡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쇼스타코비치 ©Corbis

예상치 못한 불행 
전쟁 후 소련의 문화정책을 이끈 사람은 안드레이 즈다노프였다. 1946년에 문화부 장관에 임명된 그는 “소련 문화에 있어서 가능한 갈등은 선(good)과 최선(best) 사이의 갈등뿐이다”로 요약되는 ‘즈다노프주의’를 소련의 문화정책으로 내세워 국가 정책에 어긋나는 작품은 연주를 금지하고 예술가를 탄압했다. 먼저 문학·연극·영화 부문에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쇼스타코비치는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두 자녀가 있는 가장으로서 그에게는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정부로부터 호감을 사기 위해 1947년에 네 명의 독창자와 합창, 관현악을 위한 ‘조국의 시’를 작곡했다.
그리고 애국적인 영화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러던 중 엉뚱한 데서 일이 터졌다. 1948년에 바노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에 대한 결의문이 발표됐다. 무라델리는 정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작곡가가 아니었던가! ‘위대한 우정’도 물론 그러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곡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무라델리는 조지아 지역 출신인 스탈린의 눈에 들기 위해 조지아인인 오르조니키제를 주인공으로 두었는데, 사실 오세트인이었던 스탈린이 그 내용을 싫어했던 것이다.
음악에 대한 즈다노프의 탄압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데서 시작되었다. 또다시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언급되었고, ‘조국의 시’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다. 1936년과 다른 것은 쇼스타코비치뿐만 아니라 여러 작곡가가 줄줄이 비판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프로코피예프·하차투리안·포포프·셰발린·먀스콥스키 등 이름 있는 음악가들은 모두 거론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명단에서 빼기 위해 동료들을 서로 고발하는 진흙탕 싸움도 벌어졌다.
이들에게는 모두 형식주의자라는 죄목이 씌워졌다. 이를 거세게 반발한 셰발린은 모스크바 음악원장에서 물러나야 했고, 결의문에 찬성하며 몸을 사린 쇼스타코비치도 교수직에서 해임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수일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연설을 해야 했고, 대부분의 작품은 연주 금지를 당했다. 그들은 즈다노프의 지시대로 우아하고 고상하며, 대중이 좋아할 만한 즐겁고 듣기 편한 음악만을 써야 했다. 가족들에 대한 특전 역시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은 정상급 작곡가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무라델리에게는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는 회심의 강연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이 일이 없었다면, 지금 이 글을 포함하여 그 어디서도 무라델리를 언급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다음 달에 계속)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기고와 해설, 강의 등 여러 활동으로 우리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나누고 있다. 서울시향의 프리렉쳐를 진행하고 있으며,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프로그래머로서 흥미로운 음악회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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