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애호가 정창관,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2월 14일 9:00 오전

ARTIST’S ESSAY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국악 애호가 정창관

음악이 흐르는 공간 사이로 어둠이 살며시 찾아온다. 음악은 깊어가나 소리는 낮아진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알레그로보다는 모데라토의 음악이, 모데라토보다는 아다지오의 음악이 더 어울린다. 깊은 밤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의 아름다움이 나를 슬프게 한다. 어둠 속의 빨간 진공관 불빛과 아우러져 흘러드는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의 선율 또한 나를 슬프게 한다.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가 인당수로 떠나기에 앞서 부친과 이별하는 대목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계면조로 한 대목 듣노라면 눈물이 맺히도록 슬프다.

 

음악은 마음으로 듣는 것
“음악가이기보다는 음악 철학가이고, 도스토옙스키를 음악화한 말러의 연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들을 때, 그 숙연하고 냉혹한 그리움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부모가 제 아이를 사랑하고 제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만큼 깊은 사랑과 깊은 슬픔이 있을까”
이 구절은 시인 고은의 수필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1990)에 수록되어 있다.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는 노래’는 도스토옙스키와 전혀 관련이 없다. 말러가 두 딸을 잃은 뤼케르트의 시에서 감명을 받아 작곡한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이 작곡의 동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작곡 후에 얻은 아이가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나를 슬프게 한다. 피셔 디스카우가 부르는 노래를 듣노라면 숙연해진다.
“적어도 지성인이라면 클래식 음악을 들어야지?” “대중가요나 국악은 적당한 오디오로 듣고, 클래식 음악은 제대로 된 오디오로 들어야지”라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 사람, 그의 집에 뜯지도 않은 채 뒹굴고 있는 음반을 볼 때 슬프다. 클래식 음악은 트랜지스터보다는 진공관으로 들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 스피커는 이 모델이 최고이고, 앰프는 저 모델이 최고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들이 얼마 되지 않아 스피커와 앰프를 바꾸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더욱 슬퍼진다.
음악은 고독한 취미이며, ‘자아 지향적’인 취미이다. 좋은 소리를 찾아 반평생을 헤맸지만, 아직도 좋은 소리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 그는 좋은 소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리를 찾는 것이다. 어릴 적 우연히 들었던 유성기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아직 가슴에 새기고 있는 사람, 처음 오디오를 사서 들었던 그 소리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리는 누구의 귀에든 똑같이 들어가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마다 다르다. 고막의 생김새도 다르고, 소리를 뇌로 전달하는 청각신경의 기능도 다르고, 그것을 해석하는 개인의 마음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오디오를 바꿈질해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느끼는가는 청각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아리랑을 음악으로 기념하리
올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다. 여기저기서 기념연주회가 개최되고 KBS 클래식FM에서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 음반도 출반되었다. 필자는 베토벤을 좋아해 교향곡 5번 ‘운명’ 음반만 450여 장을 가지고 있다. 멀리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초인적인 투쟁의 삶을 살았던 위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200년, 300년을 기념할 음악위인이 없는 것인가? 왜 우리는 탄생 200주년, 2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없는가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아리랑은 ‘음악’이다. 음악이 먼저고, 다음으로 악보와 아리랑에 관한 기사나 글, 그리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기억이다. 정작 아리랑 학술대회는 음악을 듣는 것은 뒷전이고, 수많은 분석과 복잡한 해석을 나열한다. 아리랑 전시회에서 담배·성냥·라이터·재떨이·밀가루·고무신 등 제조사의 이름이 ‘아리랑’인 물품이 주인공인 양 전시장을 채우고 있을 때 나는 슬퍼진다. 1926년 ‘밀양아리랑’이 처음 나올 때는 ‘날 좀 보소’라는 가사도 ‘스리스리랑’이라는 가사도 없었다. 모두 1930년 이후에 생긴 것이다. 1926년 첫 밀양아리랑 가사도 제대로 채록이 안 되어 있는데, 영남루에 있는 ‘밀양아리랑’ 노래비는 ‘날 좀 보소’로 시작해서 ‘스리스리랑’도 함께한다. 한번 세워진 노래비는 고치기 어렵다. 최초의 ‘밀양아리랑’을 듣고 진행했더라면 다른 결론을 내렸을 텐데, 슬픈 현실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하지만,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 나를 슬프게 한 것이 오늘도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니고, 오늘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 내일도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닐지어다.

 

 

정창관
정창관(1952~)은 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국악 애호가다. 국악 음반을 수집해 ‘정창관의 국악 음반 세계’(gugakcd.kr)에 데이터베이스화한다. 현재 음반으로 나온 ‘아리랑’ 음원을 ‘정창관의 아리랑’(유튜브)에 올리고 있으며, 국악FM에서 ‘정창관의 음반에 담긴 소리향기’를 진행 중이다.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 화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일러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2000~)는 장형준·신수정·강충모를 사사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취미로 그리는 그림을 SNS에 올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젊은 연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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