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암스트롱❶

대중음악사를 빛낸 재즈 뮤지션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6월 1일 12:00 오전

마이클 잭슨 이전에 20세기 미국 대중음악의 슈퍼스타 계보를 형성했던 루이스 암스트롱.그는 ‘어릿광대’라는 평가절하에 시달렸지만 그 누구도 암스트롱만큼 재즈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한 뮤지션은 없었다

마이클 잭슨 이전에 20세기 미국 대중음악의 슈퍼스타 계보를 형성했던 루이스 암스트롱.그는 ‘어릿광대’라는 평가절하에 시달렸지만 그 누구도 암스트롱만큼 재즈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한 뮤지션은 없었다

재즈의 가치를 인식한 뮤지션

1999년 12월은 여러모로 시끌벅적한 시간이었다. 그 요란스러움의 이유는 20세기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여 지난 100년을 평가하는 이른바 ‘밀레니엄 이벤트’가 대부분을 장식했다. ‘타임’지 역시 20세기 역사를 가늠하는 성대한 이벤트에 빠질 수 없었다. ‘100 Most Influential People of the 20th Century’라는 제호 아래 지난 백 년 역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남긴 인물 100명을 선정하는 특집은 가장 강력한 이벤트였다. 히틀러·간디·레닌·마르크스·루즈벨트·호치민 등의 정치인과 토머스 에디슨·알베르트 아인슈타인·빌 게이츠·다이애나 비·요한 바오로 2세 그리고 심슨의 캐릭터까지 폭넓은 범위에서 조명됐다. 20세기 역사의 주요 페이지에 선정된 음악가들인 비틀스·밥 딜런·프랭크 시나트라·로버트 존슨·어리사 프랭클린과 함께 거론된 이가 있었다. 바로 루이스 암스트롱이다. 그는 ‘라이프’지가 선택한 같은 취지의 선정에서도 영광스러운 100인의 대열에 포함됐다. 암스트롱은 재즈와 팝의 영역을 넘나들며 보컬리스트이자 트럼펫 연주자, 그리고 엔터테이너로 20세기 대중문화 발전에 위대한 초석을 다져놓은 거인이었다. 또 광대의 삶을 살았던 20세기 대중문화의 위대한 예술가이자 선지자였다.

루이스 암스트롱의 가치를 ‘위대한 재즈 뮤지션’ 또는 장르의 범위를 넘어서 ‘20세기 대중음악사를 빛낸 위대한 음악인’으로 확대하더라도 그 평가에는 왜곡이 없다. 그러나 암스트롱에 대한 평가를 정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는 재즈라는 제한도, 음악이라는 폭넓은 적용도 충분치 않다. 그는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 적지 않은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미국인들이 20세기 문화를 대중문화·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개설한 이래 등장한 거물급 스타였다. 그는 재즈의 가치를 인식케 한 뮤지션인 동시에 1930~1940년대 전 세계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스타로 광범위한 활약을 펼쳤다. 1964년 ‘Hello Dolly’를 통해 미국 팝 차트 1위에 등극했고, ‘상류사회’ ‘글렌 밀러 스토리’ 등 수십 편의 영화와 뮤지컬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CF 배경음악으로,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삽입곡으로 친숙한 그의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는 부와 명성을 좇아 재즈를 버렸다는 폄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음악 그 자체를 쫓았던 루이스 암스트롱의 낙관적 삶을 대변하고 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언제나 트레이드 마크였던 하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구수한 입담으로 청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엔터테이너였다. 프랭크 시나트라·엘비스 프레슬리·비틀스·마이클 잭슨 이전에 20세기 미국 대중음악의 슈퍼스타 계보를 형성했던 루이스 암스트롱은 “진정한 예술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보편적 미학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언제나 엔터테이너로서의 명제에 충실했다.


▲ 1949년 2월 셋째 주 ‘타임’지 ⓒBoris Artzybasheff

새로운 재즈 스타일을 창조하다

재즈는 대중성과 예술성이라는 상반된 속성을 함께 품고 있는 모호한 음악이다. 루이스 암스트롱은 이런 재즈의 이중성을 설명함에 있어 가장 적합한 대상이다. 만약 재즈 역사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단 한 명의 존재를 꼽으라면 듀크 엘링턴도, 찰리 파커도, 마일스 데이비스도 아닌 루이스 암스트롱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대중의 곁에서 재즈의 매력을 설파하는 전도사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와는 사뭇 다르게 재즈의 귀족처럼 우대되던 듀크 엘링턴조차도 “루이스 암스트롱은 재즈의 대명사였으며 항상 재즈와 함께했다. 나는 그를 사랑했으며 존경했다”라는 말로 그의 가치를 대신했다.

암스트롱은 진지한 재즈 아티스트가 아닌 ‘어릿광대’라는 평가절하에 시달렸지만 그 누구도 루이스 암스트롱만큼 재즈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한 뮤지션은 없었다. 그는 재즈에서 솔리스트로의 가치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재즈 솔로의 개념에 극적인 센스를 도입하였으며, 그의 신중함은 솔로에 있어 긴장감을 쌓아가게끔 하는 방법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루이스 암스트롱은 원곡의 멜로디로부터 탈피하여 곡의 코드 진행에 부합되는 독창적인 즉흥연주를 선보였으며, 이는 재즈가 즉흥연주라는 등식의 이해를 형성하는 위대한 선례가 되었다. 그는 자유롭게 스윙했으며, 화려한 솔로와 즉흥연주를 통해 재즈의 고유한 이미지와 정체성을 마련해준 선구자였다.

그가 재즈 뮤지션으로서 충실했던 1920~1940년대까지의 활동은 곧 재즈 신 전체의 흐름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의 고유한 스타일로 지칭되던 ‘뉴올리언스 재즈 스타일’은 곧 ‘루이스 암스트롱의 재즈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가 1920년대 말 시카고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시카고 재즈 스타일’이 잉태되었으며, 재즈의 중심지도 뉴올리언스에서 시카고로 자연스레 이동했다. 암스트롱은 재즈 트럼페터이자 재즈 보컬리스트로서 1950년대부터 평생에 걸쳐 미국 국무성의 지원 아래 올스타즈 밴드와 함께 전 세계를 순회하며 재즈를 파급·홍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루이스 암스트롱은 재즈 보컬이라는 개념을 최초이자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했던 뮤지션이었다. 그가 노래하기 전에도 재즈 신에는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블루스 보컬리스트였을 뿐이었다. 암스트롱은 재즈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블루스 보컬리스트를 제외하고는 최초의 재즈 보컬리스트로 평가된다. 1920년대 중반 결성한 ‘핫 파이브’ 시절 그는 기악적인 프레이즈를 옮긴 보컬 창법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 창법은 빌리 홀리데이뿐만 아니라 백인 남성 보컬리스트 빙 크로즈비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보컬 스타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남김으로써 미국의 수많은 대중음악가에게 보컬 스타일의 형성과 다양성의 측면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겨두었다.

루이스 암스트롱이 자신의 트럼펫을 육성화시켜 특유의 허스키한 음색으로 불어대는 스캣(무의미한 음절로 리드미컬하게 흥얼거리는 창법)은 인간의 목소리를 하나의 악기로 완벽하게 대체시킨 혁신적인 발명이었다. 이는 암스트롱의 놀라울 정도로 빠른 음악적 반응과 상상력의 결과물이었으며, 정확한 음정과 리듬에 대한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을 통해 재즈 보컬리스트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스캣이 제시되었으며, 스캣이라는 방법론은 재즈 보컬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최우선의 기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훗날 재즈 보컬의 교과서라 불리게 되는 엘라 피츠제럴드가 스캣의 모든 것을 전수 받은 대상이 바로 루이스 암스트롱이었다.

또한 그는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트럼페터이자 코넷 연주자였다. 끝없이 고음에서 솟구치는 하이 노트 프레이즈와 어떠한 환경에서도 풍부한 스윙감을 잃지 않는 능력은 지금도 재즈 트럼페터뿐 아니라 다른 기악 연주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하늘을 가를 듯 뻗어나가는 통렬한 애드리브, 농밀한 구성으로 짜인 앙상블, 진부한 틴 팬 앨리(미국 팝음악계의 중심지)를 새롭게 구조한 화성과 편곡은 그에게 향하는 부당한 음악적 편견을 무색케 한다. 그가 악보를 읽지 못했다는 소문은 그의 천재적인 트럼페터로서의 감각이 낳은 허구의 신화이기도 했다.

루이스 암스트롱의 초기 레코딩을 듣다 보면 트럼페터로서 그의 역량이 지금도 전혀 낡지 않은 신선한 사운드 그 자체임을 발견하게 된다. “재즈 트럼펫 연주자 중 루이스 암스트롱의 영향권 밖에 놓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라는 단정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암스트롱은 본격적인 솔로 즉흥연주를 통해 1920년대까지 앙상블 음악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재즈계에 솔리스트의 중요함을 일깨워준 연주자이기도 했다. 여유롭고 풍성한 스윙감을 동반한 트럼펫 솔로, 힘들이지 않고 4분음표를 8분음표로 분할하는 자유로운 프레이즈는 1920년대 초기의 딱딱한 스타카토 솔로 스타일을 진화시키는 근원이 되었다. 더불어 다채로운 코드 감각과 블루스에서 옮겨온 선율의 연주는 스윙시대뿐만 아니라 모던 재즈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즈 트럼펫 연주자에게 거대한 그늘로 자리하고 있다.

 

루이스 암스트롱은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음악가가 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코넷으로 보다 높은 고음과
화려한 연주를 펼칠 수 있다는
정보만 듣고 자신의 입술을 칼로 찢었고,
그를 수식했던 애칭 ‘새치모’는
암스트롱의 성공을 위한
강한 의지와 노력을 상징한다

가장 미국적인 스타가 되다

루이스 암스트롱은 재즈 뮤지션으로 세계를 순회하면서 미국의 친선대사라는 직함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미국적인 스타라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보다 중요한 입장에는 다분히 정치·사회적 배경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 암스트롱의 공식적인 생년월일은 1901년 8월 4일이다. 이는 그의 사후에 발견된 침례교회의 출생확인서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그럼에도 루이스 암스트롱은 생전에 스스로의 출생일을 1900년 7월 4일로 공언하고 다녔다. 20세기의 서막을 여는 1900년, 그리고 출생일을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로 공표했던 것은 유람선에서의 합법적인 연주를 1년 앞당기기 위한 전략이자 미국인으로서 애국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때문에 탄생 100주년이 2001년임에도 이미 2000년부터 루이스 암스트롱의 탄생 100주년 축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그가 생전에 남겨둔 미공개 녹음의 보존을 위해 힐러리 여사가 12만 달러, 연방 정부에서 30만 달러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2000년 7월 뉴욕에는 암스트롱 기념관이 개관했다.

루이스 암스트롱은 흑인이라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이 결정하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어머니는 루이스 암스트롱 출생 당시 16세가 채 되지 않은 10대의 미혼모였으며,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떠나버린 가난한 흑인 노동자였다. 재즈의 탄생지인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난 루이스 암스트롱은 불과 일곱 살의 나이에 매춘부들에게 석탄을 배달하고 폐품을 실은 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생계를 이어온 위험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1913년 마지막날 밤 공중에 공포탄을 쏜 죄로 뉴올리언스의 유색인 소년보호소에 18개월간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만난 소년원의 밴드 리더를 통해 기본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소년원에서 트럼펫과 코넷의 주법을 익히게 된 루이스 암스트롱은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음악가가 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코넷으로 보다 높은 고음과 화려한 연주를 펼칠 수 있다는 정보만 듣고 자신의 입술을 칼로 찢었고, 그를 수식했던 애칭 ‘새치모(철의 입술)’는 암스트롱의 성공을 위한 강한 의지와 노력을 상징한다. 그는 어린 시절의 절실한 꿈을 빠른 시간 내에 성취했으며, 머지않아 모든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명실상부한 스타가 됐다. 그의 이런 인생이 부각되는 것은 미국이 모든 이들에게 열린 기회의 땅이며 흑인들도 재능이 있다면 얼마든지 부와 명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결연되어 있었다. 루이스 암스트롱은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암을 지니고 있는 미국 사회가 현실적 고통을 망각할 수 있게끔 흑인들에게 제공한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기도 했다.

많은 흑인 인권주의자들과 흑인으로의 자의식이 강한 뮤지션들은 루이스 암스트롱을 향해 “백인들을 위해 노래하고 연주한 우스꽝스러운 엉클 톰(Uncle Tom)에 불과하다”라고 폄하했다. 그의 후배였던 많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아프로 아메리칸의 문화적 유산임을 강조하며 흑인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킨 것과는 달리 루이스 암스트롱은 백인들이 조장해놓은 허구의 이데올로기에 놀아난 한낱 광대에 불과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1956년 루이스 암스트롱은 아프리카 가나 공화국 방문 당시 “나의 조상은 이곳에서 왔고, 나에게는 여전히 아프리카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통해 자신의 뿌리와 피부색에 대한 자긍심을 내비친 바 있다.

1957년 아칸소 주의 주지사가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금지했을 때 “저런 것들이 미국 남부에서 나의 동포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미국 정부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는 경고를 남겼다. 당시 연방 정부는 암스트롱의 아프리카 순회공연을 선전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암스트롱은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 모순을 어떻게 답해야 하느냐는 반문을 통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압박했고, 결국 아이젠하워는 연방부대를 아칸소 주에 파견하는 조치로 화답했다. FBI는 루이스 암스트롱을 요주의 인물로 조사하고 감시하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그는 백인들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면서 축적했던 부와 명성을 통해 미국 남부지방 학교의 인종차별 철폐와 가난한 흑인들을 위한 많은 기부 활동을 행하기도 했다.

루이스 암스트롱은 흑인들의 음악이었던 블루스가 재즈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가장 쉽고 풍부하게 설명한 존재였다. 그는 블루스 스케일과 블루스 필링을 재즈의 화성적 기초로 확고하게 세워놓았으며, 이를 기초로 한 미국의 흑인 음악이 유럽과 러시아 음악에 맞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의 약속을 실현시켜주었다. 그는 가장 미국적이면서도 가장 흑인 음악의 본성에 입각한 음악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성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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